[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새벽 네 시 기상이 일상이 되었다. 미처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일복을 입고 현관을 나선다. 부지런한 남편은 물을 끓여 보온병에 담고, 토마토에 꿀을 넣은 과일 참도 준비한다. 밭에 도착하면 어스름하게 풀이 보이기 시작한다. 하루가 시작이다.

무궁화를 심은 밭에 잔디도 심었다. 끊임없이 자라는 잡풀들을 다스리는데 잔디만 한 것이 없을 거라는 판단에서이다. 그림 같은 잔디로 풀을 다 덮는 상상을 해가며 시작한 일이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품값이 비싼 터라 잡초제거 정도는 부부가 해결해야 하는데, 중 노동과 취미 생활의 경계가 모호했다. 팔다리에서 통증이 느껴지고, 풀을 보고도 잡아 뜯고 싶은 의욕이 생기지 않을 때, 그냥 호미를 놓는 것으로 노동의 양을 정했다. 그러다 보니 오전에 일찍 시작해서 해가 뜨거워지기 전까지 두세 시간 풀을 뽑고, 출근했다가 저녁 어스름해지면 다시 무장하고 밭에 가서 어둑해질 때까지 두어 시간 밭을 더듬는다. 처음에는 밤에도 일할 거라며 헤드 랜턴도 준비했지만, 시간이 있어도 몸에서 이상 신호가 오면 당장에 호미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경험한다. 

몸이 늙어 가는데 농사일을 다시 시작하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를 일이라며 남편이 투덜댄다. 무궁화를 심어 화려한 여름꽃을 피우고, 묘목을 나누어 천안시 어느 곳에서라도 무궁화를 볼 수 있게 만들고, 결국에는 헌법에서도 무궁화를 나라꽃으로 지정할 수 있게 만들고 싶은 꿈 때문이다. 무궁화를 국화로 지정하고자 하는 분들의 열정에 동화되어 늙어가는 시간 보태고 싶은 것이다. 

기말고사가 눈앞에 와 있다. 영어 수준보다 학년이 더 빨리 올라가는 영문과 방송 강의는 한  두 번 듣고는 도무지 그 뜻을 헤아리기가 어렵다. 그나마 요즘은 밭에 나가 그 지루한 시간을 활용해서 공부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눈은 풀을 보고, 손은 그것을 잡아 뜯으며, 귀로는 강의 내용을 청취하니 집중이 되었다. 카페에서 음악 들으며 공부하는 학생처럼, 잔디보다 새파랗게 촘촘히 깔린 풀을 하나씩 생각 없이 뜯어냈다. 그러면서 영미 희곡, 영국 소설, 미국소설을 차례로 반복해서 듣는다. 

밭고랑 어디쯤이어도 상관없이 한 강의가 끝나면 나무 그늘로 들어가 가져간 간식을 먹으며 허리를 편다. 우두둑 소리가 나는 허리를 조심조심 펴면서 버릇처럼 뒤를 돌아다본다. 헝클어진 풀 속에서 가지런히 그 태를 드러낸 잔디가 참 예쁘다. 사람 손이 지나가 잡초가 사라진 밭의 생기로운 고랑을 보면, 내내 엎드려 허리 펴지 못했던 고통의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는다. 

풀을 뽑는 일은, 마치 앞에 쌓인 업무와, 얽히고설킨 인간관계를 해결해 나가는 하루와 닮았다. 우리의 하루도 호미가 지나간 자리처럼 말끔하게 정리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원석을 깎아내 조각을 만드는 것처럼,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 즐겁다. 힘든 하루가 뒤에 오는 내일을 깔끔하게 만들어 낸다고 생각하니 사람들 사이에서 지친 날도 견딜만하다. 

저물녘 길게 이어진 고랑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내일이 있으니, 오늘은 여기서 접어도 족하다. 오늘 밤도 꿀잠이 지친 몸을 다정하게 토닥여 줄 것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