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란다 문을 열고 팔을 뻗었다. 연일 장마가 계속되는 날, 하늘은 금방이라도 물이 쏟아질 것 같은 모습으로 낮게 드리워져 있다. 일단은 집을 나섰다. 혹시 소나기를 맞을 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안은 채.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 속으로 기분 좋게 파고들었다. 한낮의 더위와 달리 새벽 공기는 다른 계절을 연상케 했다. 인조 잔디위로 맨발을 내 디뎠다. 물기를 품은 잔디가 차갑고 촉촉하다. 발가락사이로 까칠한 잔디가 파고들었다. 적당한 긴장이 시작 된다. 붉은 색 우레탄으로 도포한 트랙을 돌기 시작한다. 단단하게 전해오는 우레탄 바닥에 온몸의 체중을 싣는다.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뇌세포에 영양제라도 투여하고 싶은 심정이다. 임계점이 어디인지. 보고 또 보아도 여전히 진도는 제자리다. 조각난 단어들이 머릿속에 꽉 차 있는데 서로 연결이 안 된다. 새로운 참고 논문을 보고 주제가 흔들리기도 한다. 내게 휴일이 없어진지 오래다. 새벽 맑은 기분으로 공부하겠다고 어둑한 시간에 집을 나서 교육원에 갔다가 종일 운적도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공부도 아닌데 억울한 기분이 들어 종일 슬피 울었다. 마음이 이렇게 간절한데 왜 진도가 나가지 않는지 야속하기만 했다. 집중이 되지 않아 이런저런 자료만 출력하다가 하루를 보내고 나니 집에 와서도 눈물이 나왔다. 그러다가 혼자 피식 웃었다. 사는 게 뭔지. 공부에 왕도가 없다지만 도움이 될 방도는 있을 듯 했다. 그러다가 맨발 교육이 뇌세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간절하거나 마음이 약해지면 귀가 얇아지는 법.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모두 동원하고 싶은 심정으로 운동장 맨발 돌기를 시작했다. 새벽에 많은 사람들이 나와서 운동을 하지만 나만 맨발이다. 머리가 좋아진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남들이 나를 쳐다보거나 말거나 혼자만 허연 맨발로 걷는다.

겨우 2%의 면적으로 우리 몸의 98%를 지탱하는 발에는 신경과 두뇌를 깨치게 하는 긴장근이 있어서 걷기를 통해 뇌세포의 노화를 방지한다고 한다. 발바닥을 땅위에 디디고 걷기를 하면 긴장근에 자극을 주어 뇌운동이 시작되고 뇌세포가 15%이상 활성화 된다고 한다. 공부한답시고 운동을 게을리 하는 게 아무래도 불안했는데 겸사겸사 맨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생각하고 싶은 주제를 한 장 출력해서 주머니에 넣고 트랙을 돌면서 읽다가 생각하다가를 반복한다. 책상에 앉아 있을 때 보이지 않던 오류가 눈에 들어온다. 벌써 세달 째. 그동안 많은 진도가 있었다고 자위한다. 그렇게라도 생각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아서이다.

동네 산을 오를 때 맨발로 올랐다. 이미 남의 시선은 무시하기로 한터. 그래도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길을 택해 올랐다가 길을 잃었다. 내려가는 길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그 나무가 그 나무고 그 길이 그 길 같은 내리막을 내려오다 발바닥이 말했다. 발바닥의 감촉으로 그 길은 분명 낯선 길이었다. 그래서 다시 올라와 자세히 살펴보니 역시 다른 길을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내 의식으로 확인 할 수 없었던 세심한 차이를 발바닥은 알고 있었다.

며칠째 이어지는 장맛비 때문에 맨발 운동을 쉬었는데 오늘은 빗줄기가 뜸한 틈을 타서 운동장에 나섰다. 걷다가 서다가 하면서 연구방법론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생각을 불러 모았다. 새벽 운동장에서 나의 맨발에게 묻는다. '철학의 첫 스승은 우리의 발이다.' 라고 얘기한 루소의 말이 믿을 만한지.

집에 돌아오니 구수한 콩밥 냄새가 부엌에 가득하고 베란다에서는 빨래 종료 알람이 '딩동딩동' 경쾌하게 울린다. 우렁이 각시가 다녀간 듯하다. 새벽 소나기는 내리지 않았다. 폭우 속에 서 있고 싶은 바람은 아직도 유효하다.



/유인순 한국문인협회 천안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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