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대남방송 중지 다짐

李厚洛(이후락) 南北調節委(남북조절위) 공동위원장은 14() 상오 서울에서의 제3合議(합의) 日程(일정)을 모두 끝내고 迎賓舘(영빈관)에서 가진 記者會見(기자회견)에서 이번 會談(회담)에서 北韓(북한)對南非難放送(대남비난방송)이나 武裝間諜(무장간첩) 南侵(남침) 등에 관한 討議(토의)가 있었으며, 앞으로 그런 일이 다시 없도록 하자는데 合議했다고 말했다.

위원장은 이번 會談에서 우리 측은 北韓 측에 提議(제의)4() 項目(항목) 가운데서 合議事項(합의사항)과 합의 정신에 어긋난 행위를 하지 말고 合意事項誠實(성실)遵守(준수)하며 정직할 것을 促求(촉구)했다고 말하고 北韓 측이 내세운 소위 南北平和協定(남북평화협정) 체결 요구에 대하여는 合意事項조차 성실히 지켜지지 않는 현시점에서는 시기상조라고 했다고 밝혔다.

위원장은 또 최근 北韓國際的(국제적)外交攻勢(외교공세)를 통해 2개의 韓國을 추구하는 정세에 대해서도 주의를 환기시켰다고 말했다.

李 委員長은 또 이번 會談에서 具體的(구체적) 合意事項이 없다고 비관하지 않으며 時間(시간)이 걸리더라도 진지하게 平和統一(평화통일) 問題(문제)를 다루어 나가겠다고 밝혔다.

(하략) <8711·1973615일자 1>

 

본보에서 언급하고 있는, 남북조절위에서 합의한 사항 중 개인적으로 눈에 띄는 내용이 하나 있다. ‘대남 비방방송에 대한 토의가 그것이다.

198612, 내가 속해있던 승리부대 XX연대가 지오피로 이동했다. 전투사단에 편제돼 있는 3개 연대는 1년 단위로 밀어내기식으로 번갈아 지오피 휴전선을 담당하게 되는데, 훼바에서 지오피까지 어둠 속 행군으로 가던 그날은 눈이 내렸다. 함박눈은 이리도 아름답게 내리는데 저 멀리서 웅웅, 거리던 소리는 철책이 가까워질수록 크게 들려왔다. 북한이 남한으로 보내는 대남방송이었다. 그 소리는 현실감이 전혀 없는 이질적 소리로 느껴졌고, 왠지 모를 두려움을 불러왔다. 1년을 근무하고 훼바로 부대 이동을 할 때 즈음엔 그 소리가 자장가인 듯 들렸다. 대남방송은 북한이 지오피 경계병들을 선동하기 위한 공격방송이었고, 이에 대응해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대북방송은 방어방송이었다.

대남방송 주 멘트가 전두환, 노태우 깡패였던데 비해 대북방송의 첫 머리는 미성을 지닌 여 부사관이 전하는 친애하는 인민군 오빠였다.

북한은 2003711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 상대방에 대한 비방방송 중단을 제의하고, 같은 해 8월 이 방송을 일시 중단했으나, 20053월부터 반제민전 방송이라는 명칭으로 재개했다.

1972‘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될 때만 해도 온 국민은 통일이 금세라도 찾아올 것으로 기대하며 들떠있었다. 그러나 이후 회담은 지지부진, 197210월부터 19736월까지 공동위원장 회의 3, 본회의 3회 등 모두 6회의 회의가 개최됐으나 맹탕으로 끝났고 1973828일 북한 측의 일방적 회의 중단선언으로 활동이 종료됐다.

말만 많았던 그 잔치는 결국 남북의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였던 셈이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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