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얼마 전 친구가 경작하는 청계산 자락에 있는 주말 농장을 찾았다. 잠깐 동안 상추 등 채소를 따고 고랑을 정리하는데 한낮의 뜨거운 열기로 온몸이 후끈하게 달아올라 땀으로 적셔진다. 제법 농사짓는 재미가 쏠쏠할 줄 알았는데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조금만 돌보지 않으면 잡초가 무성해져 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땀을 흘리며 채소를 수확하면서 정성스럽게 가꾼 손길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이다. 비가 오거나 오지 않거나 노심초사하는 농부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자식들을 위해 매일 새벽기도를 드렸던 어머니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다. 주변 숲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신선한 공기가 상쾌하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하릴없이 지내다보니 벌써 오월이 지나 유월 하순이다. 인생은 찰나의 순간이라지만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여름구절초라고 부르는 하얗고 노란 데이지가 하늘하늘 바람결에 춤추며 희망과 평화를 갈망하고 있다.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뿐이겠는가. 꽃만 꽃이 아니고 사람도 꽃이 아닐까 싶다. 젊음이 지나간 후에야 젊음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꽃의 향기는 바람에 날려 흩어지지만 사람의 향기는 오래 마음속에 여운으로 남는다. 이제 여름의 한복판이다. 작열하는 햇빛이 내려쬘 때 잠시 나무그늘에서 앉아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살아가는 과정에서 때를 기다리지 못한 선택의 결과로 나중에 힘든 상황에 빠져 후회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옳은 선택을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이 평온하지만, 잘못된 선택을 하면 세월이 한참 지난 후 곤경에 처하게 된다. 인생을 요약할 수 있는 단어 중 하나는 기다림이다.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기다림은 신뢰와 믿음이다. 기다리는 것이 있다는 것은 아직 채워지지 않는 무엇인가 있다는 것이고, 오늘의 모습이 완전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기다림이 이어지는 것이 삶이다. 하나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새로운 기다림으로 끊임없이 연속된다.

성경에는 이삭의 아들인 쌍둥이 형 에서가 장자의 권세를 동생 야곱에게 팔아버린 이야기가 나온다. 에서는 장자의 권세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배고플 때 야곱이 쑨 팥죽 한 그릇과 바꾸었다. 또한 제정 러시아가 크림전쟁 패배로 막대한 재정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토의 땅 알래스카를 적은 금액을 받고 미국에게 팔아버렸다. 이것이 지금까지 대표적인 어리석은 거래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당장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단기간에 성공을 이루기 위해, 개인의 욕망을 취하기 위해 선택한 결과가 좋을 수 없다.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당장 눈앞에 놓여있는 문제를 쉽고 빠르게 해결할 수 있다는 달콤한 유혹에 빠져들면 결국 일을 그르치게 된다.

요즘 정치권은 국회의원 체포동의안 부결, 돈 봉투 사건, 부정한 코인 보유, 불법정치자금 수수, 사생활 논란 의혹 등 비도덕적이거나 비정상적인 모습들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진정한 해명과 반성으로 용서를 구하기보다는 이런저런 방법으로 적당히 법망을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는 모습에서 얻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드러난다. 국민의 삶과 직결된 민생과 복지 증진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한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묵묵하게 말없이 지켜보는 일반 국민들의 의식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울 따름이다.

논어 이인(里仁)편에서 공자가 이르기를 군자는 덕(德) 도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토(土) 처하는 곳을 생각하며, 군자는 형(刑) 법을 생각하고 소인은 혜(惠) 은혜를 생각한다고 하였다. 덕과 형을 긍정적으로 토와 혜를 부정적으로 본다. 군자는 도덕성과 공익성과 이타성의 가치를 중시하여 항상 자신이 잘못될까 우려하지만, 소인은 부도덕함과 사익을 추구하며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빠져나갈 궁리를 한다. 군자는 어떠한 일을 만날 때 반드시 해야 할 것도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없다. 오직 의로움인지 여부에 따라 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회 지도층과 정치인들이 마음에 담아둬야 할 구절이 아닐까 싶다.

며칠 전 목사님 말씀 중에 신학대학 교수직에 지원하여 여덟 번 떨어지고 아홉 번 만에 선발되었다는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았다. 최종 이사회에 매번 1순위로 올라갔지만 탈락되었다. 당시 대학의 자기사람 심기관행은 대표적 고질적인 불공정 인사였다. 여덟 번째 떨어지고 난 후 머리도 식힐 겸 가족들과 여행을 떠나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낭떠러지에 올랐을 때 힘들면 뛰어내리라는 유혹의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아들을 내려놓고 도저히 뛰어내릴 수 없어서 마음을 다잡고 다시 신학교에 지원하여 아홉 번 만에 선발되었다. 교수직에 도전한 것은 꼭 교수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정의의 문제였다고 고백하였다.

최근 각종 사회단체나 정당의 대표를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이 문제가 되어 논란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본래 목적성보다는 개인의 이익과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비상식적인 행동에서 기인한다. 평소 동지적 유대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틀어져 적대적인 관계로 변하게 된다. 적합한 때와 장소를 기다리지 못하고 단순히 개인의 욕망을 우선하기 때문에 신뢰와 믿음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지도층이나 국정을 책임지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일반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는 현실이 참 아이러니하다.

땅이 말없이 속삭인다. 바람이 땅을 스쳐 지나간다.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면 만물이 태동하고 생명이 용솟음치는 소리가 들린다. 드넓은 대지 위에 뿌려진 꽃씨가 열매를 맺는다. 아침마다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자연에 기본을 둔 일상의 삶에서 인간본연의 가치를 찾는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땀을 주룩주룩 흘리는 농부의 거무스름한 얼굴에서 희망의 미소가 보인다. 언론과 방송에 자주 비춰지는 일부 정치인의 불편한 얼굴 표정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오늘 씨앗을 뿌리는 일이 헛되게 보일지라도 머지않아 열매를 거두리라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여름날의 아침이다.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좌절하지 않고 온유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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