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익칼럼] 오병익 충북교육삼락회장·아동문학가

주름이 굵어지고 말꼬리가 길어지고 / 널브러진 약 봉지에 웃음까지 마르더니 / 몇 달 건너 하나 둘, / 전화번호를 지운다. / 떠난 이름들로 가벼워지는 휴대폰 / 머잖아 내가 지워질 차례다.

필자의 시 '지우개' 전문이다. 단짝(絶親)과 헤어져 반쪽짜리가 됐다. 마음 터놓고 속을 나눌 정도로 고들고들하던 50년 지기였는데 백세시대 칠순의 문턱도 넘지 못한 허무의 색깔, 그게 시리다. 6주기 해진 퍼즐을 주섬주섬 맞추다 보니 어느 새 황혼이 비친다. 사그라듬은 한순간, 세월이야 누구에게나 공평하다는 건 자명한 이치지만 늘어난 나이가 부쩍 거추장스럽다. 요즘 노인 괄시와 조롱, 하물며 따돌림은 더 서럽고 버겁다.
한껏 쪽팔려 무릎 치며 후회할 일도 수두룩해졌다. 나이 듦의 준비와 학습 부족에서다.

고장 난 늙음

며느리 갑(甲)질보다 외려 잘나가는 아들 학대가 무섭다했나. 부모 자식은 희로애락의 실제 삶이어서 털어놓기 쉽지 않다. 그 뿐만 아니다. 심지어 지금껏 본적 없는 60세 이상 노인의 출입을 제한한 '노시니어존'(노인 출입 금지) 카페 앞 천덕꾸러기에 울컥 치민다. 무슨 억하(抑何)심정일까. '사람 숫자보다 덜 주문하고 시끄러우면서 오래 머문다'고? 꽤나 면구한 일이다. 세상은 바뀌는데 흐름을 눈치 채지 못하니 고개를 돌려버릴 모양새다. 설령 억울한 게 산더미처럼 쌓일지언정 꼬장 부리듯 '젬병, 멋대로 해 봐' 따위의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말자. 홧김에 불쑥 차별 내지 혐오를 맞섰다간 정말 국물도 없다. 
'대변 치우기 귀찮아 노인 항문을 기저귀로 틀어막은 요양병원 간병인이 경찰에 붙잡혔다'(한국일보 2023년 5월 26일), 이래저래 불안하다. 누구나 앞날을 알기란 쉽지 않다. 물론 '늙는 것'과 '나이 값'은 별개 과제다. 품위 있는 '연륜' 이야말로  인생의 최종 바람일 터, 그나저나 막 돼먹기가 도를 넘어선 후안무치에 대리수치심을 느낀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북문 주변. 한 백발의 노인이 담벼락과 마주한 채 엉거주춤 서 있었다. 바지춤을 내리더니 그대로 소변…'(다음 뉴스) 파렴치 추태까지 늙음의 자유인 줄 착각하는 고장 난 어른, 자기 팔자 자기가 꼰다. 어르신 품귀 현상을 어쩌랴.

정치 노화?

자신만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오만처럼 위험천만한 바보란 없다. 박식한 사람일수록 질문 외에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 독판 딴죽걸기로  무시 당하면서 정작 이슈를 첨예하게 논의해야할 땐 훈수조차 안 보인다. '노미(老美)'의 간절함을 잊은 거다. 고백컨대 필자 역시 정교수도 아닌 주제에 남루해질까 봐 에둘러 불똥을 피한다. "난 교수법 강사잖아요. 정치 질문은 그만" 번번이 학부 학생들 흥분마저 실망시킬 때마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그 말을"(가수 최헌, '앵두')가사 밖에 딱히 떠오르지 않는다. 심히 망가진 '정치 그물'에 지적은커녕 부화뇌동하는, 소위 무늬만 우아한 원로의 주접을 꾸짖을 지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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