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 정상회담 개막

닉슨 () 大統領(대통령)蘇聯(소련) 共産黨書記長(공산당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는 18() 下午(하오) 11() 30()(韓國時間·한국시간)부터 백악관에서 제1·(·) 頂上會談(정상회담)을 갖고 兩國(양국)간의 무역 및 經濟協力(경제협력) 共同(공동) 關心事(관심사)와 유럽 減軍(감군) 戰略武器(전략무기) 制限問題(제한문제)를 비롯한 國際問題(국제문제) 등 광범위한 問題들에 관한 토의를 개시한다.

한편 닉슨 大統領은 브레즈네프와의 頂上會談을 앞두고 16에 이어 17또 다시 키 비스케인 南部白堊館(남부백악관)에서 헨리 키신저 安保擔當特別輔佐官(안보담당특별보좌관)1時間(시간) 이상 최종 戰略會談(전략회담)을 갖고 브레즈네프와의 會談()美國 측의 基本戰略(기본전략)을 다졌으며 캠프 데이비드 別莊(별장)에서 휴식중이던 브레즈네프도 外相(외상) 안드레이 그로미코와 駐美大使(주미대사) 아나톨리 도브리닌 유엔大使 야코브 말리크 및 對外貿易相(대외무역상) 니콜라이 파톨리체프 등과 會談을 갖고 닉슨 大統領과의 會談을 위한 準備(준비)를 끝냈다.

이번 닉슨·브레즈네프 頂上會談에서는 核武器(핵무기) 制限(제한) 유럽 安保 유럽 減軍 에너지 貿易 海洋(해양)운수 科學文化(과학문화) 交流(교류) 中東事態(중동사태) 인도차이나 平和問題(평화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토의될 예정이다. (하략) <8714·1973619일자 1>

 

우리의 부모 세대는 면서기를 위세가 매우 높은 직으로 알았다. 일제강점 하에서 주재소 순사나 면 서기나 소학교 훈도(訓導)는 고압적인 자세로 우리 백성들을 핍박했다. 그 기억의 잔재다.

70년대 초 뉴스에 단골 메뉴로 등장하는 이름 넷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김일성 주석, 닉슨 대통령, 브레즈네프 서기장. 그런데 어렸던 우리들은 참 의아했다. 대통령이나 주석이 그 나라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라는 건 알겠는데, 소련에선 뜬금없이 서기장이라니. 기껏해야 면서기들 중 우두머리쯤 되는, 면장보다도 더 낮은 직책일 텐데.

러시아가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연방)이었던 때 그들은 미국과 더불어 세계 2대 군사강국이었다. 현재 소련의 바통을 이어받은 러시아 또한 군사력 2위를 차지하고는 있지만, 1년 전 우크라이나를 불법 침공한 뒤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거기엔 허수가 많이 들어가 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미소 양국의 무기 중 특히 핵무기는 그 수와 위력 면에 있어 가공할 수준이었다. 만약 세계 3차대전이 일어난다면 지구는 멸망하고 말 것이란 두려움에 떨었었다. 그래서 미소 정상회담에서 가장 민감한 부분은 핵무기 제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1922년부터 소련은 모두 열 명의 서기장을 거쳤다. 그 중 레닌, 스탈린,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우리에게 낯익은 이름이다. 흐루쇼프를 축출한 인물은 그의 정치 고문관이자 동료였던 브레즈네프였다. 브레즈네프는 재임 기간 동안 동구권 국가들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소련의 군력 증강을 꾀했다. 그러나 경제 문제 해결은 등한시 했다.

1982년 브레즈네프 사후 안드로포프, 체르넨코 등이 서기장에 올랐고, 마지막으로 고르바초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그는 스탈린 지우기를 벌였다. 고르바초프는 서방 민주주의 국가에 문호를 개방하는 정책을 폈으며, 결국 1991년 소련의 해체를 이끌었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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