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빗물을 머금고 촉촉하게 서 있는 한 그루의 나무, 풀 한 포기, 초록으로 흐르는 바람 한 줄기에 설렌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을 달리다가 맞이한 차창 너머의 풍경에 매료되었다. 하루하루 살아가야 하는 일들이 그리도 급급했던가. 늘 다니던 익숙한 길임에도 낯선 곳인 듯 새롭고 신선하다.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댐의 풍경이 무척이나 다채롭다. 수면은 침묵 하고 있는 듯 고요하다. 서두름 없이 여유를 누려보라고, 성급한 성향을 지닌 내게 마치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잠시 그쳤던 비가 앞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세차게 내린다. 고요하던 수면이 조용하게 뭉클거리는 듯싶더니 순간,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란의 몸짓이다. 갇혀있던 물이 수문을 통과하는 순간, 하얗게 거품을 토해내며 물기둥이 허공으로 치솟는다. 장엄함에 가위가 눌렸다. 휘돌아 치며 우르릉거리는 물줄기 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것만 같다. 두려움에 의식 없이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무엇을 위한 갈구였기에 저토록 몸부림 치는가.  

어느 순간 나도 한 방울의 물이 되어 허공으로 치솟는다. 포효하듯 하늘로 솟구쳤다가 거침없이 떨어져 내렸다. 귀청이 찢어질 듯, 거센 물줄기의 외침은 고된 삶의 사념들로 채워진 내 혈관을 시원하게 뚫어 놓는다. 두려움은 사라지고 세신(洗身)의 쾌감을 느꼈다. 

댐에 갇혀있던 물은 허공으로 솟구쳤다가 가장 낮은 곳으로 떨어지는 혼돈 속에서 잠시 제 가야 할 길을 잊고 맴돌다가 가장 낮은 곳을 찾아 흘러든다.

물은 대지의 온 생명체에 젖줄이다. 반면 홍수로 인해 감당 못 할 재난이 되기도 한다. 한 방울의 물들이 모여 쏟아내는 위력 앞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가 떠오른다. 

물은 어떤 특정한 형체나 색깔, 자신만의 향도 없다. 흐르다가 막히면 돌고 돌아서 흐르고 어느 곳에 담겨도 무한한 변화로 마냥 부드럽고 온유하여 유약한 듯 싶지만 결코 꺾임이 없다. 

긴 가뭄 끝에 맛보는 생명수에 초목들이 생생하다.  쑥쑥 자라는 벼 포기마다 농부의 고된 노동이 신선한 삶의 향기로 바람결에 얹혀온다. 밭둑엔 망초 꽃이 하얗게 허공을 채워가고 바람의 노래는 초록으로 흐른다. 

자연은 세세하게 누군가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고 목마른 대지에 비를 내려 흙의 속살까지 보듬는다. 하지만 세상은 자신의 이기심을 포장하며 쏟아내는 말, 말의 불순물들이 넘쳐흐른다. 세찬 빗줄기에 말끔하게 씻겨 나가기를. 

현란하던 빗줄기도 어느새 차분해졌다. 

시골집 토담 위, 동그마니 달린 애호박이 풋풋하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돌아가는 일상을 핑계로 잊고 살았던 것에 대하여, 놓친 것에 대하여 애틋함이 솟는다. 옛정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그 곳으로 한 걸음에 달려가 닫혀있던 문 활짝 열어놓고 미운이 고운이 모두 초대하여, 들기름에 지글지글 지져 낸 애호박전에 막걸리라도 한 잔 나누어야 할까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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