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사람 물결인가. 강물인가. 출발할 때만 해도 한적한 마을의 축제로만 여겼다. 막상 도착해 보니 수국과 사람들이 어우러져 남실남실 유구천을 따라 흐른다. 작열하는 태양을 피해 그늘을 쫓아 나릿나릿 걸어 그들 속으로 들어간다.

오직 나에게만 집중하며 시간을 보내게 된 지 두 달이 되었다. 열심히 살아 온 심신이 잠시 쉬어가야 할 처지다. 처음엔 진즉에 이기적으로 살 것을 하는 후회를 했었다. 하지만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의사의 소견에 따라 치료를 잘 받고 그동안 미루던 일을 무리 되지 않는 선에서 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지역 축제도 찾아가고 맛나다는 음식점 앞에서 줄을 서게 되었다. 오늘도 출근했던 남편이 서둘러 일을 보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퇴근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운전이 부담스러워 혼자하는 외출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남편과 함께하는 일이 많아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신혼 때처럼 지내게 된 것이다. 일터를 소중히 여기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이 사람이 집에 갇혀있는 것을 남편은 안쓰러워한다. 이번에도 콧바람 쏘이자 하여 따라 나오게 된 것이다. 평일인데도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늘어선 상화객들이 장사진을 이룬다. 소담한 꽃송이들이 색깔별로 줄지어 사진 찍는 사람들과 어우러진다. 주로 풍경이나 남편의 뒷모습을 찍다가 꽃처럼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담는다.

수국은 토양에 따라 색깔이 변한단다. 종류가 같더라도 파란색을 키우고 싶으면 산성흙에, 분홍색을 원하면 알칼리성 흙에 심어야 한다. 아이들이 거울삼아 보는 것은 잘 가꾼 마음 밭을 갖은 부모인 것을 생각하니 여러 색의 꽃이 예사로 보이지 않는다. 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칠까. 스스로는 무슨 색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사람의 색깔을 생각하다 보니 한 색깔에 멈추지 않고 변화할 줄 아는 수국이 그저 꽃으로만 보이지 않는다.

꽃말은 색깔에 따라 다르다. 보라색은 진심과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다. 그래선지 주로 결혼기념일의 선물로 쓰인다. 분홍색은 진실한 사랑과 처녀의 꿈이어서 신부의 부케가 된다. 하얀색과 파란색은 변덕, 냉정이란다. 꽃말만으로도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다. 남녀 간의 사랑이든지 친구 간의 우정이나 사람의 관계에서 이런 감정들이 오고 간다. 마음을 표현할 때 색깔을 잘 고르면 수선을 떨지 않아도 서로 느끼게 된다. 무미건조하지 않은 방법이다.

돌아오는 길, 안내 부스에서 받은 사진첩은 지난해 사진전의 입상작으로 꾸며졌다. 그중 안노인이 수국밭에서 휴대폰으로 꽃 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이 가슴에 와닿는다. 한참을 들여다보며 그의 젊은 날은 어떠했을까 헤아려 본다. 고단한 세월을 보냈음을 되돌아가 보지 않아도 알고 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한국전쟁을 겪은 것만으로 숙연해진다. 그 시대의 여인으로 산다는 것, 어머니의 삶을 통해 들여 다 보았으므로 가슴 한쪽이 아릿하다. 그러니 안노인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다. 꽃을 바라보는 눈빛이 애잔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곳이 수국밭이다. 유난히 눈길을 끄는 보랏빛, 그가 곁에 있어서 쉬어갈 수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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