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장마전선이 동서남북으로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장대비를 세차게 뿌려 댄다. 전국적으로 대부분 지역에 호우경보가 내려지고 인명과 재산상 많은 피해를 가져왔다. 지루한 장마가 물러갔다는 생각으로 잠시 안도감을 느낄 즈음 주말에 장마가 시작된다는 소식에 다시 긴장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계속된 장마가 지나간 후 불볕더위가 시작되면 아이러니하게도 비를 손꼽아 기다린다. 거친 장마에 지친 몸과 마음이 뜨거운 햇볕을 받으면 에너지가 충전되는 기분이다. 날씨가 오락가락하는 만큼이나 마음도 덩달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장맛비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외출하였다가 일찍 집에 들어오면 저녁식사를 하고나서 가까운 양재천이나 공원을 찾아 산책한다. 길가 주변 잘 가꿔진 화단에서 피어있는 꽃들이 수줍은 듯 얼굴을 살짝 내밀고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새색시처럼 수줍어하는 접시꽃, 순결한 사랑의 백합, 그리움으로 피어난 백일홍, 해가 진 저녁에 수줍게 피는 분꽃 등 각양각색의 꽃들이 무심한 마음을 유혹한다. 여름에 피는 꽃들은 더위에 지쳐 무미건조해진 감성을 활짝 열어주기에 충분하다. 세상사는 일이 힘들지라도 화려하고 순결하게 피어난 꽃들에게 빠져드는 순간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그려진다.

작년 말 30년이 훨씬 넘은 직장생활을 정리한 후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즐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을 가졌다. 하지만 세상 살아가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주변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이 여전히 바쁜 일상으로 머물게 한다. 사회 초년생 시절부터 월급을 받을 때마다 항상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가졌다. 그렇다고 다른 직원들보다 일을 덜하였다거나 나태하였다는 것은 아니지만 가진 능력을 온전하게 쓰지 못한 아쉬움 때문이다. 그때부터 조직에 도움이 되지 못하면 언제든지 떠나야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 지나고 생각해보니 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아직까지도 하루가 지날 때마다 남는 말할 수 없는 아쉬움을 떨쳐버릴 수 없다.

올해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손자가 매일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인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주 함께 놀러 다녔는데 요즘은 같이 지낼 시간이 별로 없다. 가끔 장난스럽게 무슨 일로 바쁜지 물어보면 학원 공부와 숙제하느라 바쁘다면서 천진난만하게 미소를 짓는다. 방과 후 학원 일정에 맞추다보니 저녁시간조차 여유롭게 보내는 일이 쉽지 않은 것 같다. 혹시라도 어른들한테 관심이나 칭찬받는 것이 좋아서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너무 힘들면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였더니 정말 좋아서 재미있게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으니 그나마 조금은 다행이다.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사회지도층과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이나 가족과 관련된 문제들이 언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음모론을 주고받으며 조직을 총동원하여 서로 상대방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행태를 보여준다. 이런 개념 없는 무분별한 태도가 정치혐오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무엇보다 논란에 대한 정확한 해명과 진정성 있는 사과가 우선이라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자신의 의혹을 덮으려고 상대의 의혹을 파헤치고 터뜨려서 정치적 논쟁으로 확대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일반 국민들은 가슴 속이 타 들어갈 지경이다.

얼마 전부터 젊은 세대를 표현하는 N포족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족이 되고, 이에 더해 취업과 내 집 마련마저 포기한 오포족이 되고, 결국 셀 수 없을 정도로 포기한 것이 많다는 뜻에서 N포족이 나왔다. 중국의 바닥에 눕는다는 뜻을 가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탕핑족, 일본의 모든 것을 체념하며 받아들인다는 사토리 세대가 이와 유사하다. N포족이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생겼다면 탕핑족은 코로나19 영향이 가장 크다고 한다. N포족은 사회적 압박과 경제난에 분노하며 적어도 자본소득을 통한 인생 전환을 꿈꾸는데 비해 사토리 세대는 체념하고 스스로 생활에 만족한다는 것에 차이가 있다.

많은 젊은 세대들은 원하는 일을 하면서 살고 싶은데 분명하게 떠오르지 않는다고 호소한다. 이들은 대체로 부모 세대보다 많은 것이 잘 갖춰진 좋은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래서인지 절실하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만 하다. 당장 원하는 것이 없고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다면 우선 잘하고 싶은 자발적인 움직임을 가지는 것도 한 방법이다. 자발적인 움직임은 결핍에서 비롯된다. 필요하고 원하는 일이 기회가 없을 때 간절해지는 것이다. 자발적인 움직임은 일을 잘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조직의 문제 이전에 스스로 자존감을 갖게 한다. 자존감은 바로 행복을 연결하는 통로가 된다.

세계적으로 다시 떠오른 트렌드인 스텔스 웰스(stealth wealth)는 과시하지 않는 조용하고 우아한 가치를 강조한다. 아는 사람만이 아는 우아함은 드러나지 않는 진정성을 근간으로 한 태도에서 나타난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인한 불편한 환경이 삶에 장애가 될 수는 없다. 인생의 각본은 수많은 고정관념이 축적되어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각본은 일종의 고정관념이다. 자신의 인생을 바꾸고 싶다면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생각이나 관념을 바꿔야 한다. 삶을 변화시키는 열쇠는 지금까지 자신을 속박해온 고정관념을 단순하게 바꾸는 것이다. 간결한 것이 더 아름답다는 단순함의 미학과 드러나지 않는 우아함은 서로 일맥상통한다.

젊은 세대가 꿈을 포기하는 나라는 미래가 없다. 희망이 있어야 미래가 있는 법이다. 청년들이 의욕을 가질 수 있는 질 좋은 일자리를 제공하고, 노력한 만큼 보상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마크 트웨인은 “곤경에 빠지는 것은 무엇인가를 몰라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확실히 안다고 착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진로를 잘못 설정한 각본을 끝까지 고수하려는 태도가 실패를 가져온다. 사회지도층의 고정관념이 생각보다 심각하다. 능력이 부족한 것보다 변화를 거부하는 것이 문제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사슴을 쫓는 자는 산을 보지 못한다. 고정관념을 벗어나서 진정한 변화를 통한 조용하고 우아한 가치를 찾아야 한다. 하여튼 잘해야 한다. 미래는 분명하게 다가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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