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연일 자드락 비가 계속된다. 여기저기 수해 소식으로 마음이 먹장구름이다. 바로 인접해 있는 오송의 궁평 지하차도가 물에 잠겨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제방 둑이 터지면서 어이없는 일이 순식간에 벌어졌다. 남의 일이 아니다. 방심인가. 무관심인가. 안전불감증에 대한 인식은 꼭 일이 일어난 뒤에 잠깐 스치다 이내 사라지곤 한다. 사후약방문이다. 엄청난 재해는 작은 틈, 무심에서 비롯된다.

장마 중에 잠깐 든 햇볕과 함께 습한 무더위가 수위를 넘는다. 늦깎이 중학생 어머니들이 1학기 기말고사를 보는 날이다. 80대 왕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한 손에는 책가방, 다른 손에는 먹을거리가 담긴 가방을 들고 들어온다. 하얀 청포묵과 쑥버무리 떡이다. 

"아니, 시험 보는 날, 막바지 공부를 해야지. 먹을거리를 만들고 있으면 어쩝니까?" 핀잔 아닌 핀잔을 날리면서도 젓가락은 어느새 묵을 향해 날쌔게 꽂힌다. "나야 어찌 되었든 동생들 시험 잘 보라고" 

주름살 사이로 하회탈 미소가 배어 나오는 그녀의 얼굴엔 이미 세상 달관의 경지가 엿보인다. 중학 과정을 공부하는 교실에는 교과서 외에 이렇게 세상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또 다른 학습의 장이 열린다. 평생학습의 진수다. 문제를 이해하느라고 웅얼웅얼 소리 내어 지문를 읽으며 답을 찾아가던 왕언니도 다행히 60점을 넘겼다. 과락 맞은 학생은 없다. 모두 재시험 없이 통과다. 얼굴 빤히 쳐다보며 듣더니 목소리 높이던 부분이 먹혔나 보다. 즐거운 웃음소리가 교실 안에 가득 펴진다. 

"선생님, 이게 뭐라고. 공부를 시작하고부터 왠지 자신감이 붙었어요. 나도 모르게 막 목소리가 커지고 활발하게 움직이니까, 사람들이 왜 깡패가 되었냐고 해요" 막내가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변화에 대해 목청을 올린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자격지심에 스스로 주눅이 들어 지내온 세월을 이제야 돌아보는 이들이다. 가방끈이 짧아서 앞에 서야 할 때도 늘 뒷전이었다고 토로하는 이도 슬그머니 속내를 열어 보이기 시작한다.

"선생님, 카톡으로 제가 글 쓴 거 보냈어요. 한 번 봐주세요." 수줍음 가득한 반장 학생이 목소리를 낸다.
 '한 학기를 마치며'란 제목으로 동료 학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볼펜으로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이다. 서로 배려하고 베풀어준 이야기와 이들이 있어 주저앉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가슴으로 찡하고 파고든다.

진정성이 묻어나고, 정이 넘친다. 이것이 사람 사는 사회 아닌가. 공부를 왜 하는가. 진정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 아닌가. 이 기본을 모르는 건 일부 기득권 세력이다.

기말고사를 끝으로 학생들은 2주간의 방학에 들어간다. 본격적인 휴가철이다. 여느 때 같으면 산으로, 바다로 휴가 떠나는 이야기로 떠들썩할 때인데 올해는 수해로 모두 숙연하다. 

'물은 만물을 먹여 살리면서도 자기주장으로 다투지 않는다. 장애물이 있으면 슬쩍 돌아가기도 하고 스스로 낮은 곳으로 흘러 바다를 이루어 간다. 

주눅 든 이들도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한 사람을 온전히 키워낸 약수다. 연약한 줄기로 흘러 흘러 강물로 어우러지고 바다를 향해 손잡고 나아가는 한 방울의 귀한 물이다. 물의 흐름이 곧 세상을 살아가는 이치다.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바다의 속성과 닿아 있다. 이를 거스를 때 자연은 커다란 재해로 일침을 가해 온다. 밖은 아직도 빗소리가 세차다. 이제 곧 햇살이 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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