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백성혜 한국교원대 교수

학교가 변하고 있다. 이제는 예전처럼 학교에서 정한 시간표에 학생들이 수업을 듣던 형태에서 벗어나, 스스로 진로를 결정하고 이에 관련된 선택과목을 듣는다. 고교학점제 등의 변화는 이러한 목적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진로를 확고하게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진로를 선택하려면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서 그러한 시간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다. 단지 진로개발역량 검사지 등을 활용하여 진로를 안내하거나, 주니어 커리어넷, 진로체험지원센터, 진로진학상담교사의 안내로 어떤 직업들이 있는지 피상적으로 학생들에게 알려줄 뿐이다.

한국교원대학교에 입학한 학생들도 교사라는 직업을 잘 알고 선택했다기보다 부모나 교사의 권유, 학교에서의 간접적 경험 등으로 선택한다. 그런데 막상 교사가 되어 보면, “아차, 이 직업이 내 적성에 맞지 않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후회하는 경우가 꽤 많다. 우리가 선망하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입사한 신입 사원들도 꽤 많은 수가 일 년을 못 버티고 퇴사한다고 한다. 그렇게 여러 직업을 전전하는 젊은이들이 많다니, 얼마나 큰 시간과 노력의 낭비인가?

진로에 대한 고민의 시간이 아깝다고 해서, 그 시간을 없애고 남들이 좋다는 것을 선택하면 그건 남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진로선택을 강요하니, 별 고민 없이 친구들이 선택하는 과목을 듣다가 원하지 않는 진로가 결정되어 버리는 상황도 종종 생긴다. 하지만 고등학교에서 한번 진로를 결정하면 학생생활기록부에 남기 때문에 이걸 변경하면 대학 진학에 심각한 문제로 인식된다. 입학사정관들은 이러한 변심을 진로선택에 대한 의지 부족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생들은 무심히 선택한 진로를 평생의 꿈처럼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 생기고, 결국 그 문제는 그 직업을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후에 포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다.

우리는 젊은이들에게 진로를 방황하는 시간을 주어야 하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쿵푸 선생, 음식남녀, 와호장룔, 색계, 라이프 오브 파이 등 세계적인 영화를 만든 이안 감독은 38세가 될 때까지 직업이 없었다. 생물교사인 부인이 벌어오는 수입으로 집에서 살림했으며, 그동안 시나리오를 집필했다고 한다.

“당신 무얼 하는 사람인가요?”라는 질문에, “저는 집에서 살림하면서 시나리오를 쓰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은 “백수예요.”라고 말하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이 들릴 것이다. 가시적으로 보이는 성과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긴 기다림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데뷔하는 순간부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 작품의 감독이 될 수 있었다.

30억 개의 인간 유전자에서 오직 2%만이 단백질을 만드는 정보를 가진 유전자이고, 남은 98%는 특별한 기능이 없다고 한다. 대부분의 쓸모없는 유전자가 왜 진화의 과정에서 없어지지 않고 만들어지기 위해 우리는 엄청난 에너지를 낭비하는가? 그 이유를 과학자들은 이 유전자가 생명현상의 숨은 조력자로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이제는 쓸모있음만 강조하는 역량 중심 교육에서 벗어나, 쓸모없음을 가치로운 자아 탐색의 시간으로 보는 용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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