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진흙이 덕지덕지하다. 명치까지 올라 온 불그스레한 흙탕물이 빠지자 몰골이 드러났다. 거기 인꽃들이 피어났다. 물을 끼얹고 씻어내느라 서로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며칠 동안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그날은 밤을 새우고 아침이 되도록 폭우가 쏟아졌다. 와병 중이라 집을 지키는데 일터에서 전화가 온다. 물이 주차장까지 차오른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 되었다. tv에서는 일터와 인접한 미호강의 둑이 터져 오송 지하차도에서 차량들이 물에 잠겼다는 속보가 몰아친다. 상황은 무서우리만치 빠르게 움직이더니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지고 끝내 인명사고가 났다. 그리고 비보가 끝없이 이어진다.

남편은 매장 건너편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 돌아왔다. 강변 쪽 건물에 갇혀있던 사람들은 보트를 타고 구조되었다. 이쪽에선 그나마 인명피해가 없는 것이 다행이다. 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도로를 가득 채운 물이 빠져야만 들어갈 수 있었다. 일요일인 다음 날 간신히 매장으로 진입한 남편은 망연자실하였고 인터넷TV 기자가 따라 들어와 처참한 광경이 생중계되었다. 기가 막혀 눈물도 나지 않았다. 삼십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처음 겪는 일이었다. 아수라장 속으로 이웃들이 들어오고 교회에 다녀오던 사람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다음날도 이웃들이 매장을 찾았다. 봉사단체의 이름이 박힌 노란 조끼를 입었는가 하면 그저 지나가다가 도움이 되고자 들어선 이도 있다. 젊은 부부는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손을 보탠다. 성직자의 길을 걷기 전 슈퍼를 운영했다는 분은 손끝이 야무져 일머리를 가르쳐주기까지 한다. 직원들은 휴무를 반납하며 연장근무를 마다치 않는다. 근처에 사는 형님댁과 친정 식구들은 생업까지 미루었다. 문단 선배들도 몇 차례 들러 도와주고 용기를 주었다. 멀리 있는 지인들은 위로 전화를 주고 음식을 보내주기도 했다. 아이들도 부모의 위기를 함께 헤쳐나가 주었다. 그래선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수해를 당한 지 열흘 만에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쯤 되자 함께 수해를 입은 이웃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면사무소에서 점심을 먹고 매장으로 돌아오며 상가들을 유심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직도 황량한 모습에 가슴이 아프고 먼저 매장 문을 연 것이 미안해지기 시작했다.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일어섰기에 나도 손을 내밀고 싶어졌다. 속수무책인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은 세상에 알리는 일이라 여겼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우리 매장의 비참했던 사진을 다시 한번 공개하기로 했다. 그동안 살아남은 이들의 고독한 사투를 알려야 했다. 다행히 기자의 도움으로 인터넷뉴스가 되었다. 그리고 앞다투어 매장을 찾아 주는 나랏일 보는 분들에게 이웃을 도와주십사 머리를 조아렸다. 

미호강 이쪽에선 인명피해가 없었으므로 그저 다행이라 여겨야 할까. 목숨을 앗은 오송의 지하차도가 인재였다면 삶터를 잃은 미호 사람들의 이야기도 그러할 것이다. 방송국의 마이크가 이 사람의 가슴에 달렸다. 이번 수해로 많은 것을 잃었지만 소중한 이웃을 얻었다. 그들이 기적을 일으켰다. 인꽃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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