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씨 동경서 실종

 

韓國(한국)의 前(전) 國會議員(국회의원)이었던 金大中(김대중)씨가 8日(일) 오후 1時(시)경 유숙하고 있던 동경의 그랜드팔레스 호텔에서 신원 미상의 韓國말을 쓰는 5名()의 靑年(청년)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日本(일본)의 한 경찰 대변인은 이 사건에 관해 유괴라는 말을 사용할 단계는(기사 1행 잘림. ‘아니라고 말했다.’로 추정)

이 대변인은 5名의 靑年들이 호텔에 들어와 金大中씨를 옆방으로 에스코트할 당시 金大中씨와 韓國의 國會議員인 金경인씨는 호텔방에 앉아 있었다고 말했다.

이 중 金경인씨는 곧 풀려나와 그의 방으로 돌아갔으며 金大中씨는 어(기사 1행 잘림. 내용 추정 불가)

日本 警察(경찰)은 金大中씨가 동경시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시 외곽과 국제공항을 세밀히 조사중에 있다고 말했다. <8759호·1973년 8월 10일자 1면>

 

김대중 납치 사건은 한국 정치에 있어 가장 수치스러운 흑역사다.

야권 지도자를 납치해 살해하려 했던 이 사건은 일본과의 외교적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사건이 벌어진 곳이 동경시내 한 복판이었던 까닭이었다.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일본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을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 일본 도쿄도의 그랜드팰리스 호텔 2210호실에서 납치했다. 그들은 그를 용금호에 실어 동해에 수장하려고 시도하다 실패하고, 5일 만인 8월 13일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에서 풀어줬다.

김대중이 바다에 수장될 위험이 있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 동해 일본측 해안에서 해상자위대 함정이 추격해 왔고, 사건이 발각될 것을 우려한 요원들이 계획을 변경했던 덕분에 그는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사건의 중심에는 당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있었다. 일각에선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그의 과잉 충성심이 납치와 살해를 획책했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김 전 대통령은 자신을 암살하라고 지시한 배후는 박 대통령이었다고 여러 차례 단언했다.

왜 박 대통령은 김대중을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던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최대 정적으로 그가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1970년 9월에 진행된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은 경선을 통해 김영삼을 누르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 ‘40대 기수론’을 표방하며 민주 지도자로 부상했던 둘은 이후 평생 정치적 숙적이 됐다.

여하튼, 김대중과 박정희의 양자대결 구도로 진행된 선거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은 정책 대결을 이끌며 선전했다. 그러나 1971년 4월 27일 치러진 7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불과 94만표 차이로 석패했다. 그것이 박정희에겐 너무나 큰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김대중은 그의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집 문 앞에 이르러 이제 막 퇴근해서 돌아오는 가장들처럼 초인종을 눌렀다.”

이후 그는 온갖 역경을 딛고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15대 대통령선거에서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됐다./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