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강물이 맑아지고 달빛이 깊어지는 가을이라고 어느 시인이 읊었다. 또 다른 시인은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자꾸 가을에게 부끄러워진단다. 그 가을의 가운데를 가고 있다. 맨몸으로 팔랑팔랑 팔을 흔들며 지나고 싶다. 오늘은 어떤 강을 건너고 있는가. 눈을 감는다.

업어달란다. 내 목에 팔을 두르고 등에 폭 엎드린 아이가 제법 무겁다. 허리를 조금 구부리고 노래를 부르며 천천히 걸음을 놓았다. 아이의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내 등에 제 몸을 온전히 맡겼다는 그 하나만으로도 나는 입이 벌어졌다. 금방 자라면 업어줄 이유도 없고 업어 달라고 하지도 않을 것이다.

업어준다는 것은 그 존재의 무게를 다 받아주는 것이란다. 그런데 그 무게가 점점 더 무거워져서 쓰러질 정도가 된다면 생각은 달라진다.

“어제는 무게를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은 싫다.”는 친구의 도리질하던 얼굴이 생각났다. 결혼 안 한 아들에게 멸치조림이나 된장국을 포장해서 나르는 것도 싫고, 사업이 어려워진 남편이 잠을 못 이루고 내는 한숨 소리도 싫다고 했다. 나이 든 몸이 감당하기 어려우니 하는 푸념이다.

업어준다는 것은 어디 몸뿐인가? 자식이 결혼하고 살아도 걱정이다. 부부간의 믿음을 지키며 진정 사랑하고 사는지, 손가락질 받을 일을 하고 살면서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가치의 중심이 무엇인지 잘 세우고 가는지를 종종 생각한다. 그것들이 무너졌을 때 스스로 져야 할 짐의 무게를 이미 알고 있는 부모의 염려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다. 그저 ‘그들은 그들의 강을 건너는 중이다’라고 혼잣말을 할 뿐이다.

강을 건너는 이야기는 그리스 로마 신화에도 나온다. ‘이올코스’의 왕자 ‘이아손’ 이야기다. 이올코스의 왕이 죽자 그 동생 펠리아스가 왕자가 어리다는 핑계로 왕좌에 앉았다. 가까운 친척들이 어린 왕자 이아손을 빼돌려 깊은 산에 숨기고 케이론 밑에서 배우게 했다. 이제 청년이 된 이아손은 뜻을 이루기 위해 산 아래로 내려오게 되었다. 그때 강가에서 노파를 만났다. 노파는 이아손에게 업어서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했다.

이아손은 노파를 업고 강으로 들어갔다. 쉽게 건널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강은 가도 가도 끝이 없고 노파의 무게는 천근 무게로 느껴졌다. 게다가 여울의 물살이 세서 신발도 한 짝 놓쳤다. 신발 찾을 엄두도 못 내고 힘을 다해서 강을 건넜다. 그리고 숙부를 찾아가 왕위를 찾아야겠다고 말했다. 숙부는 이아손이 ‘그리스의 자존심’이라는 황금 모피를 찾아오면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숙제를 주었다. 이아손이 마침내 ‘아르고 원정대’를 만들어 황금 모피를 찾아온 후 왕좌를 되찾는다는 이야기다.

강을 건너면서 물 아래에 있는 돌들이 어떤 모양인지 얼마나 미끄러운지 알 수 없다. 어디가 물살이 세고 어디가 움푹 파인 곳인지 건너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남이 건너는 것을 보고 따라가다가 미끄러지는 일은 또 없을까? 강 건너의 풀이 푸르러 보여 발아래를 잠시 놓친 적은 없는가?

우산 장사 아들과 집신 장사 아들을 둔 어머니의 걱정같이 부모는 자식의 일을 가슴 중심에 두고 산다. 대신 건너 줄 수 없는 강들을 그들이 갈 때 무거운 짐을 지고, 혹은 신발 한 짝 놓치고 강을 건널지라도 물살에 휩쓸리지 않고 강을 다 건너기를 기도할 뿐이다.

신화에서는 죽으면 레테의 강을 또 건너야 한단다. ‘망각의 강’인 레테의 강을 건너면서 이승의 일들을 다 잊는다고 한다. 레테의 강을 얼른 건너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나 힘을 내는 이유는 내가 가는 모습을 자식이 보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사막을 갈 때 앞서가는 사람의 발자국이 반갑듯 나도 내 길을 잘 걸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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