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통치는 참으로 가혹하고, 주도면밀했다. 1910년에서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무단헌병통치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일본 제국 육군 소속 헌병이 치안에도 투입되었다. 이 시대의 상징은 학교 선생님들도 교실에서 칼을 차고 다녔다는 것이다. 이후 삼일운동이 일어나고 한민족에 대한 통치방법이 바뀌어야 한다고 느낀 일제는 이른바 문화민족분열통치를 시작했다. 1920년부터 1930년까지이다. 헌병이 보통경찰로 바뀌었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이 시기에 친일행위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일제는 한국을 자신들의 병참기지화 했다.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이에 해당이 된다. 국가총동원법이 발효되었다.

일제강점기는 철저하게 일본을 위한 정책뿐이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사회 그 분야를 막론하고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근대화 과정을 거쳐야 할 시기에 저임금 노동력의 한국인들이 착취당했고, 한국에서 쌀값을 오르지 못하게 하며 대량 일본으로 가져갔다. 자영농이 육성되기는커녕 노예나 다름없이 취급당했다. 이전부터 가지고 있던 도지권 마저 인정되지 않았다. 산업현장 근로자도 본토 일본인보다 턱없이 낮은 저임금으로 혹사당했다. 임금인상은 없었다.

자본가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의 돈 되는 핵심사업은 일본에서 온 기업들이 다 차지하고 있었고 거기서 얻은 수입은 일본으로 보내졌다. 해방 후에는 교육받은 행정인력이 없어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그대로 자리에 두는 우리로서는 수치스러운 일이 발생했다. 일제 통치로 근대화 교육이 시작됐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참고로 광복 직후 한국에서 문맹률은 80%였다. 

일본이 한국의 봉건적 신분제를 없앴다는 것도 근거 없는 말이다. 법적으로 신분제가 철폐된 것은 1894년 갑오개혁 때이다. 일본은 자기들도 귀족작위를 가지고 있었고, 호적을 만들 때 (조선)백정출신들은 따로 표시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사회문제가 우리의 책임인 것은 맞다. 그러나 우리가 얼마나 부족하고,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무능한가를 분석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제78주년 광복절을 맞이하여 우리가 되새겨야 할 것은 우리가 겪었던 아픔이 역사 속의 한 장면이 아니라, 그 식민지배의 결과를 극복하면서 여기까지 온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정신이 말살되고, 한민족임을 부인당하고, 열등한 민족이라 교육받고, 가진 모든 자원을 철저하게 제도와 정책적으로 빼앗기고, 국가가 성장하고 발전해야 할 시기에 생존을 위협받았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여러 문제를 해결하려면, 이러한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열등하고 부족해서가 아니라, 참혹한 상처를 극복했어야 했다. 독립유공자들에 대한 더욱 철저한 예우가 이루어져야 하며, 일본으로부터 문화재 환수의 노력도 지속되어야 한다.

필자는 대학교 때, 저소득층 생활실태조사를 나간 적이 있다. 전공과 관련된 간단한 아르바이트로 생각했던 나에게 그분을 만난 것은 충격이었다. 쓰러져가는 허름한 도시 빈민 주택을 방문했다. 온 방에 신문지와 한자로 쓴 글귀가 적힌 한지가 잔뜩 붙어 있었다. 온갖 고서와 책으로 가득 찼지만, 방 주인의 빈곤한 삶을 짐작하게 했다. 그분은 붓으로 뭔가를 열심히 쓰고 계셨다. 그리고 함께 방문한 주민센터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저분은 독립유공자 ***십니다." "정말 훌륭한 분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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