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경제성장률 10.3% 이룩

 

政府(정부)는 81년도의 1人當(인당) 國民總生産額(국민총생산액·GNP) 1천달러·輸出(수출) 1백억달러 目標(목표) 달성을 위해 總(총)13조1천2백억원을 投入(투입), 年平均(연평균) 10.3%의 經濟成長率(경제성장률)을 이룩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經濟의 長期(장기) 展望(전망)’(73~81년)을 확정 발표했다.

太完善(태완선) 經濟企劃院(경제기획원) 長官(장관)은 17일 “이 長期 展望은 1천 달러 所得(소득)과 1백억 달러 輸出 目標(목표) 달성을 위한 국민적 의욕의 결정이며 내일에의 번영을 기약하는 결의”라고 전제하고 이 두 가지의 기본적 지표와 함께 重化學工業(중화학공업) 분야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우리 경제의 자립기반을 구축하는 한편 國際收支(국제수지)의 균형을 이룩하고 都市(도시)와 農村(농촌) 間(간)의 所得격차를 줄여 福祉社會(복지사회)로 지향코자하는 대과업이라고 말했다.

이날 太 長官이 밝힌 長期전망의 주요 골자는 GNP(국민총생산액)가 72년의 3조2백70억원에서 81년에 7조3천3백10억원으로 2.4배, 1人當 GNP(經常價格·경상가격)는 3백2 달러에서 9백83 달러로 2.1배, 輸出은 16억4천5백만 달러에서 1백9억7천만 달러로 6.7배, 그리고 人口(인구)는 3천2백35만9천명에서 3천6백70만9천명으로 增加(증가)케 돼있다. (하략) <8766호·1973년 8월 18일자 1면>

 

1970년대 초반, 학교 건물 벽면은 물론 동네 담벼락까지 선명한 글씨로 도배했던 문구가 ‘100억불 수출, 1000불 소득’이었다.

경제개발(經濟開發)은 박정희가 내세운 지상과제였다. ‘보릿고개’를 제대로 넘어가자면 무엇보다 먹고 살만한 ‘무엇’을 찾아야 했는데, 박정희는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통해, 특히 공업 부문에 대한 투자로 난관을 뚫고자 했다. 그리고 이 같은 계획과 성공은 그의 공과를 되돌아볼 때 ‘공’의 영역에 속하기도 했다.

다만, ‘눈 부신 경제성장’이라는 과실 뒤에는 인권조차 말살된 채 열악한 환경 속 생산 현장에 내몰렸던 수 많은 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1959년 3월 부흥부 산하에 있던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3개년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이고, 그 뒤 제2공화국에서는 이 계획안을 토대로 경제개발5개년계획(1961∼1965)을 작성했으나 여건의 변화로 실시되지 못했다.

박정희는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뒤 1962년부터 본격적인 경제개발계획을 5년을 단위로 실시했다.

본보 기사에 등장하는 3차 경제개발계획은 1972∼1976년까지. 기본 목표는 산업구조의 고도화와 균형성장을 위한 성장·안정·균형의 조화였다. 기본 방향은 중화학공업의 육성과 자본재의 수입의존도를 지양하고 국민경제의 자립화기반을 더욱 다진다는 것이었다.

1차 개발계획이 성장의 여건에, 2차 개발계획이 양적인 성장에 치중했던 것에 비해 3차 개발계획은 질적인 충실화에 뒀다.

담벼락마다 적힌 구호, ‘100억불 수출’이 실현된 건 1977년. 1964년 1억달러 수출 돌파 이후 13년 만에 100배 가량 수출 증가를 이룬 ‘한강의 기적’이었다./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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