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얼마 전 태풍 카눈이 불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잔뜩 긴장하면서 걱정스럽게 며칠을 보냈다. 한반도를 종단으로 관통하면서 동쪽을 할퀴고 일부 지역에 시간당 90㎜ 이상 물 폭탄을 쏟아붓고 지나갔다. 동해안은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극한 호우로 온통 물바다가 되어 눈덩이처럼 피해가 속출하였다는 안타까운 소식마저 들려온다.

많은 비가 내려 피해가 컸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사전 대비를 하여 피해를 조금이나마 줄였다니 다행스럽다. 이제 인류를 위협하며 지구환경 파괴를 가속화하고 있는 전 지구적 환경문제는 한 국가만의 노력이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문득 어린 시절 소나기가 쏟아지는 여름날에 웃통을 벗어 던지고 친구들과 들판을 마구 뛰어다니며 놀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비에 흠뻑 젖은 채 숨을 고르며 제자리에 서서 지천으로 널려있는 들풀과 꽃들을 바라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즐겼다. 꽃을 한 아름 가슴에 안고 집에 돌아와 빈 병에 꽂아 책상에 올려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곤 했다. 꽃잎이 시들지 않게 물을 채워 지켜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돌보는 일이 미숙해서인지 그리 꽃들이 싱싱하게 오래가지 못했던 여름의 아픈 추억으로 남아 있다. 여름에 피어나는 꽃들을 바라보며 포근하게 삶을 지켜주고 지탱하는 존재라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다.

2023 제25회 새만금 세계스카우트잼버리가 많은 문제와 논란을 일으킨 채 막을 내렸다. 대회 개최 전 코엑스 지하광장에는 더위를 피해 몰려든 각국 스카우트들로 북적거렸다. 대원들의 밝고 발랄한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하지만 폭염 대비 숲 조성, 배수시설, 화장실 등 기반시설 준비 부족으로 참가자들이 고통을 겪는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결국 미국, 영국 등 철수와 태풍 발생으로 급하게 수도권 등 여러 지역으로 분산하여 진행되었다. 다행히 폐막식에서 진행된 K팝 슈퍼라이브 콘서트에 참가한 스카우트 4만 여명이 색색의 국기를 흔들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열광하면서 월드컵 경기장을 뒤흔들었다. 그나마 잼버리대회를 무사히 마칠 수 있어 천만다행이다.

며칠 전 서초구에 있는 서이초등학교 앞을 지나가는데 방학 중이라서인지 주변이 한산하다. 학교 담장을 둘러싸고 줄지어 놓인 조화들이 한층 마음을 무겁게 한다. 최근 다양하게 발생하는 충격적인 사건 사고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놀라움과 걱정을 잔뜩 안겨주고 불안에 빠져들게 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일들이 상쾌하고 즐거운 것보다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당황스러운 일이 많다. 정말 이 세상을 살아가기가 여간 쉽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머리는 무겁고 뜨거워지며 가슴은 새털처럼 가볍고 차가워진다.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다양한 문제들이 머리를 아프게 하고 더불어 감정은 메말라지고 삭막해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처를 받을지라도 대체로 아무렇지 않은 척 내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생각이나 감정을 표현하거나 말하지 않는다면 남들은 절대로 알지 못한다. 결국 상처받고 아픈 마음은 오직 자신뿐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고민이 있거나 고통을 받을 때 도움이 필요하면 요청하고, 마음을 전달하고 싶으면 표현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아픈 마음이나 감정을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한다고 해서 손해 볼 일은 없다. 표현하는 것은 대안을 찾는 것이며, 또 다른 기회를 얻을 수 있는 수단이다.

여름 한낮의 고향집 넓은 마당은 항상 고요하고 적막하였다. 언제나 여름 꽃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 텅 빈 마당을 번갈아가며 자리를 채워준다. 한여름의 적막함과 고요함을 깨뜨리는 꽃은 진한 주황색 능소화가 아니었을까 싶다. 대문 담장을 휘감고 올라서서 한가한 오후에 장난치듯 곤두박질치며 톡톡 떨어지는 꽃잎이 잔잔한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옆에 있는 석류나무도 초롱초롱 매달린 꽃잎을 떨어뜨리며 박자를 맞춘다. 별이 지는 자리에서 다시 빛나라는 의미의 꽃말을 능소화가 가진 이유를 알 것 같다.

뜨거운 햇볕 아래 고개를 숙이고 졸던 호박꽃이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살며시 기지개를 켠다. 집 뒤란 모퉁이에 피어난 하얀 분꽃이 실낱같은 바람에도 넘실거리며 온몸으로 춤을 춘다. 봄에 피는 꽃이 봄을 이끌고 와서 잔치를 베풀고 지나간다면, 여름에 피는 꽃은 해와 달의 순환에 맞춰 고단한 삶을 지탱해준다. 우주 질서에 따른 대자연의 조화로운 모습이 이와 다름이 없다. 어두운 시기나 곤란한 상황에서도 반드시 기회와 희망이 찾아온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피고 지는 꽃들에게 삶의 소중한 지혜를 얻는다.

많은 철학자들은 매일 죽음을 생각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어느 누구라도 죽음이 결코 가깝게 느껴진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뿐인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는가? 이 질문에 삶의 의미를 다시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지금까지 진정 나답게 살지 못하고 삶의 대부분을 자신이 아닌 가족이나 인연으로 채워졌다는 사실을 새삼 알아차린다. 지금부터라도 하루하루를 생의 마지막 날처럼 힘들면 힘든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가장 잘 어울리는 걸음걸이로 걸어갈 일이다. 단 한 번뿐인 인생을 허비하지 말고 정직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어슴푸레해질 무렵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니 짙은 회색빛 구름이 하늘을 온통 뒤덮고 있다. 거센 바람과 함께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진다. 도로를 쏜살같이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 소리마저 빗소리에 파묻혀 버린다. 비를 피해 처마 밑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위를 바라보니 플라타너스 잎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소리를 눈으로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사회지도층과 정치인들이 자기 정치논리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온전해지기를 탄식하며 온몸으로 울부짖는 국민들의 목소리를 순전한 눈으로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빗소리가 들릴 만큼 창문을 조금 열어두고 잠에 빠져들고 싶은 기분이다.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정직하고 순수해지기를 소망하는 마음이 정녕 한 여름날의 꿈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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