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양승복 수필가

배롱나무 입추가 지나고도 열흘이다. 아침저녁으로 달라진 밤공기에 잠자리가 편안하다. 올 여름은 배롱나무 꽃을 보며 더위를 이겨낸 것 같다.

우리 병원 정원은 넓으면서도 정돈이 잘 되어 있어, 여유 있는 잔디밭에 배롱나무 몇 그루가 뜨거운 여름을 지루하지 않게 했다. 현관을 나서면 입구부터 붉은 꽃이 너울거린다. 입구에 있는 나무는 언덕에 위치하여 사람 손을 타지 않아 마음대로 가지를 뻗어 냈다. 그리하여 가지마다 매달린 팔뚝만한 꽃다발이 주렁주렁 열리듯이 늘어져 있다. 소담하게 피어있어 바라보는 나도 소담하게 화답하니 하루 기분이 좋다.

계단을 내려가면 잘 가꾸어진 꽃들이 재잘거리듯이 피어있다. 반듯한 여염집 규수같이 한 곳도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수형이 아름다운 나무들이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정원을 가꾼 이들의 솜씨를 칭찬해야 할 것이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 예술만이 아니다. 나무의 균형을 맞추어 가지치기를 하고 나뭇잎과 꽃들이 돋아나고 피었을 때, 그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고, 성글지 않도록 분배하는 기술도 예술이다. 어느 꽃이 지고 어느 꽃이 피어나는지 알 수 없지만. 배롱나무 밑에도 붉은 꽃이 피어있으니 분명히 꽃은 지고 있다. 그러나 늘 같은 모습으로 꽃은 피어있으니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한 공을 어떻게 이야기할까.

푸른 잔디 위에 붉은 꽃자리는 방금 떨어진 꽃잎이요. 수많은 꽃송이에서 작은 꽃송이 하나 떨어진대서 서럽지 않을 것이요. 그 자리 다시 피어나는 꽃들이 있어 안녕을 고할 것이리니. 순리에 따라 피고 지는 것을. 잔디에 누워 다시 피어나는 꽃들을 보며 붉었던 정열을 땅으로 보내는 숭고함을 나는 보고 있다. 꽃이 진 자리 옆에 새로운 꽃이 피어나고, 다시 피어나고 하여 같은 모습으로 피어있는 꽃들은 우리네 삶이다. 세상은 그렇게 채워지면서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가니 말이다.

살아오면서 많은 일들이 가슴을 서늘하게 하고, 아파서 잠 못 이루는 밤들도 있었건만, 이렇게 작은 꽃들이 지고 다시 피고 하듯이, 소소한 것들이 나를 흔들어 가슴을 멍들게 했었지 않았나. 설령 그것들이 가슴에 이름 모를 우울이란 이름으로 존재한다 해도 나는 흔들어 깨우지 않을 것이다. 자다가도 문득 생각나는 것들이 있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일들이 있어도, 배롱나무 아래 붉은색으로 떨어져 있는 꽃들처럼 서서히 땅속으로 보낼 것이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대담해진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용기가 아니고 마음이 담담해진다는 뜻이다.

필자가 병원에 근무하는 것은 구속이 필요해서이다. 어울려 일하고 그 속에서 웃어가며 같은 일을 하는 동지를 만들고 싶어서이다. 내 영혼이 적당한 틀 속에서, 그 속에서 나름 행복한 자유를 찾고 싶어서 일을 놓지 않고 있다. 꽃들이 피고 지고하면서, 지는 꽃들이 나일 수도 있고, 그 자리를 채우는 새로 피어나는 꽃들이 나일 수도 있는 초연함을 배롱나무는 가르친다.

이 병원 안에는 시들고 있는 인생들도 피고 싶어 몸부림치는 이들이 있어, 움찔거리며 내 무디어진 감정들이 흔들릴 때가 있다. 그들은 한 번도 피어보지 못한 꽃들이고, 피어나지 못할 꽃들이기에 그 서러움을 어디에 원망하리요. 인생에서 정열을 맛보지 못한 그들을 위하여 해줄 수 있는 일은 배롱나무 꽃처럼 늘 같은 모습으로 피어있어야 한다. 지면 다시 피워서 그들 앞에서는 늘 꽃으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누리는 값을 톡톡히 치러야 할 것이다. 한여름을 배롱나무와 함께하며 아직도 멀기만 한 내 허물을 올해도 한 꺼풀 벗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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