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육정숙 수필가 

38도로 뜨겁게 달아오르던 열기가 몇 차례의 빗소리에 한풀 꺾였다. 에어컨을 가동시키지 않아도 될 만큼 산산해지니 풀 향기를 음미 할 여유가 생겼다. 

오랜만에 저녁 산책길에 나섰다. 동글동글한 붉은 토끼풀이 방긋이 웃어준다. 꽃이 이삭모양인데 주위를 둘러 곧게 난 얇은 털이 에워 쌓이고 촉감이 부드러워 유년 시절에 상대를 간지럽히며 놀았던 강아지풀도 있다. 쪼그리고 앉아 귀엽고 깜찍한 것을 손바닥에 올려놓고 간지럼을 태워본다. 소소한 재미에 빠져있다보니 어느덧 어둠이 내려 가로등 불빛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길바닥에 쓰여진 '안심귀갓길'이라는 글귀가 돋보인다. 주위를 둘러보니 위험에 처하게 되면 누르라는 스위치도 군데군데 마련되어있다. 조금 전까지 두어 사람이 근처에서 산책을 했었는데 보이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니 어둑해지는 산책길에 아무도 없다. 나 혼자다. 길바닥에 안심 귀갓길이라고 쓰여 있는 글자에만 형광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순간 요즘 혼자 지나가는 여성들에게 일어난 끔찍한 사건 사고들이 떠올랐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누군가 내 뒤를 쫓는 것만 같아 집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마음이 다급해지니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는다. 겨우겨우 집에 도착해보니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고 턱까지 차오르는 호흡은 진정이 되지 않았다. 

산책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간쯤이 고즈넉하니 좋다. 바빴던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자연과 교감하면서 느긋하게 마음을 보듬던 시간인데 이제는 편안히 즐길 수가 없다. 벌건 대낮에도 폭행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니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문제인지. 

더불어 일본은 방사성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한다고 난리고 지구 반대편에선 산불이 나고 홍수가 나고 지진이 일고 한편에선 전쟁이 일어나고, 이상기후로 무더위에 호흡마저 힘든데 아파트 주차장 천장이 느닷없이 무너져 내리니 우리가 사는 곳이 사람이 살 곳이던가 싶다. 이제는 더 이상 편안하게 살 수 없는 걸까. 문득 한경애의 '조율'이라는 노래 가사가 생각나서 부분적으로 옮겨본다. 
 

'가는 곳도 모르면서 그저 달리고만 있었던 거야, 지고지순한 우리네 마음이 언제부터 진실을 외면해 왔었는지.  잠자는 하늘 님이여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 옛날 하늘빛처럼 조율 한번 해 주세요. 미움이 사랑으로, 분노는 용서로, 고립은 위로로, 충동은 인내로, 모두 함께 손잡는다면, 서성대는 외로운 그림자들, 편안한 마음 서로 나눌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오늘보다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었을 뿐인데. 모두 앞만 보고 달려가느라 놓치고 잃어버린 것이 있었으니 무엇이던가. 노랫말대로 어딘지도 모르고 달려만 가고 있었기에 꽃들은 시도 때도 없이 피고 지고, 지구는 마냥 뜨거워지고 사람들은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바쁘기만 한 걸까. 

옛날 하늘빛으로 조율 한 번 해달라고 애절하게 외쳐대는 가수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대며 온몸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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