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오래간만에 보는 하늘이다. 감옥에 갇혀있던 것도 아니고 세상을 마음껏 돌아다니는 사람의 눈에 보이는 하늘이 이토록 새로울 줄이야. 소라색 바탕에 하얀 뭉게구름이 피어올라 더없이 청명한데 난데없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외로움이 덩어리째로 가슴에서 울렁인다.

얼마 전 돌부리에 걸렸었다. 균형을 잃고 냅다 엎어져 통증으로 눈을 감았다. 지나가던 이가 다가와 손을 잡아준다. 따뜻한 온기에도 일어서지 못하고 주저앉은 채 정신을 가다듬고 있었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주는 그의 손길이 깨진 무릎에 닿았다. 소리도 낼 수 없을 만큼의 아픔이 온몸을 휘감는다.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 여기저기 휘청일 새도 없이 넘어진 이웃들이 얼기설기 누워있는 모습이 보인다. 그들을 일으켜주라고 나도 모르게 구경꾼들을 향해 소리친다.

불길에 휩싸이거나 물길이 모든 것을 휩쓸어 가는 일,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재해를 겪으면 암담함은 어떻게 표현할 길이 없다. 살아남은 것에 감사할 여유도 없이 살아남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런 때 서로 도우며 용기를 주는 모습이 애틋하다. 동병상련으로 다독일 때는 어디에서 힘이 나는지 서로에게 천군만마가 되어 준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한 번쯤 넘어져 보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아이러니하게도 삶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된다. 주위의 벗들에게서도 옥석을 구분하게 된다. 어려운 일을 겪었을 때 비로소 보이는 참된 인연을 구별할 줄 알게 된다.

하지만 법은 냉철하다 못해 매정하기까지 하다. 여기까지 오느라 애쓴 삶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가. 손에 쥔 것 없으니 성실함만이 무기라 여기며 자그마치 삼십 년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아 이루어 놓은 것들에 대한 능멸이 아니고 무엇일까. 열심히 일하여 세금을 내고 직원들과 함께하는 매장을 이루고 그것을 지켜 내느라 무던히도 애쓴 우리에게 가혹한 형벌이다.

중소기업으로 발돋움하며 지역 특성상 연로하신 어르신들의 손발이 되어 주었는데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공장이 아니어서, 10인 이상의 기업이어서 재난 중에도 도움을 줄 수 없다고 한다. 관공서는 이 부서 저 부서로 돌리며 녹음기처럼 같은 말만 반복한다. 그들도 지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평상시 소상공인에게 주어지는 혜택을 언감생심 탐하였던 적은 없었다. 다만 자연재해와 한데 얽힌 인재로 인한 수해를 입고 국가로부터의 매몰찬 외면을 받으니 두 번, 세 번 범람하는 물속으로 내던져지는 기분이다. 우리 매장만 그러는 줄 알았으나 지역 tv뉴스에 나란히 나온 약국과 한 건물에 매장 두 곳을 운영하는 점주와 처지가 같아 서로 아픔을 다독이게 되었다. 사람만이 옥석이 있는 게 아니다. 내가 속해 있는 사회의 구성에도 섞여 있다. 그중 법률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이며 이번 기회에 연관 짓지 않을 수 없다.

지난 홍수로 근방에서 가장 큰 금액의 손해를 입은 일터는 고독한 몸부림 중이다. 하소연해도 들어 주는 이 없으니 넘어졌지만 일어서야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표정을 지어야 한다. 장터에서 부모의 손을 놓친 어린아이의 마음도 이러할까. 그날은 살아 있음에 감사했고, 오늘은 더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사라진 하늘자리에 쓸쓸한 바람이 분다. 설움 때문일까.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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