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이희영 배재대학교 기초교육부 교수

개강을 했다. 방학동안 조용했던 교정은 다시 학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개강 1주차 수업 때 이 수업의 목표가 무엇인지, 앞으로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안내를 하고, 간단한 질문지에 답을 작성하게 한다.

교과목 수강 이유와 기대하는 점, 이 수업을 시작하면서 하는 다짐, 담당 교수에게 바라는 점과 같은, 뻔한 질문들. 내 질문에 학생들도 뻔하게 대답하기 시작한다. 교과목 이름을 보고 끌렸다거나, 앞으로 사회에 나가기 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거나, 열심히 수업을 듣고 최선을 다해 과제를 수행하겠다는 보통은 학기가 끝나기 전에 잊힐 뭐 그런 약속들.

학생들은 대부분 무표정하게 이런저런 약속을 써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제를 보고 멈칫한다. 그 문제 하나에 일순 좌절하는 눈빛도 보이고, 왠지 수업을 잘못 골랐다는 후회도 느끼는 듯하다. 그 문제는 아주 흔한, 살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마주했을 문제이다. 자기소개 괄호 열고 10줄 이상 괄호 닫고.

요즘 대학생은 흔히 MZ라는 말로 통칭된다.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문화에서 국가의 민주주의나 경제개발과 같은 거대한 과업을 등에 업고 성장한 기성세대와 다르게,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개성을 존중받으며 단단한 자의식으로 무장한 세대. 집단의 위계질서를 거부하고, 자신이 무엇보다 중요한 세대. 세상에 나를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세대.

하지만 그들도 언제나 자기소개를 어려워한다. 하긴, 나라도 그럴 것이다. 오늘 처음 본 교수에게 나에 대해서 뭐 그리 할 말이 있겠는가. 상대가 나에게 무엇을 궁금해 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을 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사실 이럴 때 쓰기 제일 좋은 것이 MBTI이다. 언제가 부터 학생들의 자기소개에 빠지지 않고 영어 네 글자가 등장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설명해야할지 모르겠는 나를 영어 4글자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다니, 효율적이기까지 하다. 말 그대로 가성비 좋은 자기소개이다.

사실 이러한 레이블링 게임의 속살에는 오늘날 MZ세대가 하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나도 날 모르겠는 시대. 무엇을 해야 할지 결정하기 어려운 시대. 몇 개의 질문에만 답하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규정해주니, 복잡하지 않다. 또 상대를 알아 가기에도 이보다 쉽고 명쾌할 수가 없다.

이러한 방식은 어쩌면 충분한 시간을 들여 취향을 공유하며 나를 표현하고 상대를 이해하던 기성세대는 이해하기 어려운 자기표현 방식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를 객관화하여 계량하고, 그 결과 값을 주변과 공유하며 확인받는 오늘날 MZ세대의 자기소개 놀이는, 자기 존재의 지향점을 찾기 어려워진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내는 청년들의 정체성 찾기의 한 단면이다.

몇 개의 질문에 사람을 유형화하고, 이 중 하나를 나라고 소개하는 청년들을 보며, 어떻게 인간이 몇 가지의 종으로 나누어질 수 있냐고 걱정하지마시라. MBTI에 제시되는 16개의 유형으로 80억 인류를 모두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은 그들도 알고 있으니 말이다. 그저 이 결과 값은 앞으로 충분히 복잡하게 나와 상대를, 나아가서 세상을 알아갈 시작점이기 때문이다.

나는 수업 첫 시간, 학생들의 질문지를 걷어 쭉 훑어보며 이야기한다. “얘들아. 너희들이 MBTI를 다 써놔서 하는 말인데. 나는 ISTP야. 아주 차갑고 냉정하지.” 학생들이 빙긋 웃는다. 그래. 그거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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