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 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하늘이 무척 높아졌다. 초가을 하늘이 맑고 푸르다. 이제 정말 가을이다. 가을빛이 하늘에서 내려 온통 상서로운 기운으로 가득 채워진다. 아직 떠나지 않은 남은 열기가 하늘로 올라가 비가 되어 내려오니 날씨가 선선하다.

아침은 영롱한 이슬처럼 빛나고 고즈넉한 밤이 되면 공기가 청량하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질 때쯤 설렘으로 가을꽃은 피어난다. 산책로에 가지런히 피어있는 코스모스가 고개 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반겨준다. 계절에 상관없이 꽃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아직 가을은 영글지 않았지만 따뜻한 햇살에 마음이 풍족해지는 기분이다.

그득한 여름 벌레소리와 꽃잎이 뒤섞인 몇 날을 무언가에 골몰하면서 헤매었다. 문득 희끄무레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며 구도자처럼 홀연히 깨달았다. 이제 곧 여름이 끝날 것이라는 소식이다. 아열대 불볕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무성한 여름의 뒷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산책길에서 늘 하던 습관처럼 양팔을 어깨 위로 올리고 흔들면서 움직인다. 세상사에 지쳐 단단하게 굳은 근육을 풀어주니 좀 가뿐하다. 하늘 한가운데 둥실둥실 떠 있는 뭉게구름이 어린아이 몸짓으로 수줍게 춤을 춘다.

요즘 버스 정류장 서너 구간 정도의 거리는 어지간하면 걸어간다. 길가 화단에는 그리움으로 가득 채워진 백일홍, 손대면 톡하고 터질 것 같은 봉숭아꽃, 페르시아 여왕의 보석이 꽃이 되었다는 채송화가 활짝 피어있다. 재래시장 입구 모퉁이에서 소쿠리에 채소를 듬뿍 담아두고 바닥에 주저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할머니의 깊은 이마 주름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바로 앞을 바쁘게 스쳐지나가는 사람들의 표정과 꽃들이 어색한 조화를 이룬다. 잠시 멈춰 서서 회색빛 도시 풍경을 바라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잔잔한 슬픔이 밀려온다.

잘못된 말에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거나 정신적 충격으로 고통을 겪는다는 기사를 최근 자주 보게 된다. 특히 학교나 직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는 사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탈무드에는 어떤 언어를 쓰느냐에 따라 이웃을 얻을 수도 있고, 이웃이 서로 원수가 되기도 한다는 말이 있다.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이웃이 될 수 있고 원수가 될 수 있다. 소중한 가족이나 가까운 동료나 친구 사이에 좋은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통의 관심사를 공유하는 정치권과 사회단체도 이와 마찬가지다.

어떻게 하면 말을 잘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 대체로 사람들은 말에 대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부러울 정도로 말을 잘하는 사람조차 항상 어떤 두려움이 존재한다고 한다. 말을 잘한다는 것은 설득을 잘한다거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이다. 따뜻한 말은 차분하면서도 설득력이 있다. 그래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고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좋은 말은 사람을 살리고 살려내는 슬기로운 말이다. 모든 관계에서 서로 의견이 다를 때 불같이 화내고 충돌하며 분위기가 나빠지는 일이 종종 나타난다. 좋은 말은 노여움을 잠재우고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

최근 육사 홍범도 장군 흉상 이전, 광주 정율성 역사공원 사업 추진 등 사회적 정치적 논쟁이 심각하다. 사람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나온 길에 과오가 있을 수밖에 없다. 현재 상황에서 보면 당시 시대적 흐름이나 시각이 많이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한순간에 존경하던 인물이 폄하되고, 폄하된 인물이 갑자기 존경할 인물로 부상한다. 정치가 없는 세상이다. 국론 분열이 걱정이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 지금 현재는 과거가 되어간다. 지난 과거는 바꿀 수 없고 다가올 미래는 알 수 없다. 잘못된 역사나 잘된 역사나 교훈이 된다. 거울은 먼저 웃지 않는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프랙탈(fractal)은 일부 작은 조각이 전체와 비슷한 기하학적 형태를 말한다. 나뭇가지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나무는 자라나면서 큰 줄기에서 잔가지로 뻗어나고 잔가지는 더 작은 가지로 뻗어 나간다. 이렇게 줄기 끝부분까지 수차례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물밀듯 몰아치는 파도는 매우 복잡해 보이지만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어느 한 부분을 확대하면 전체 모습과 흡사하고 전체를 축소하면 어느 한 부분으로 보인다. 전체와 부분의 구조가 같다. 사회와 역사 속에서도 이런 현상이 나타난다. 작은 단위로 보면 각각의 논쟁거리로 혼란스럽지만 큰 단위로 보면 일정한 주기와 패턴을 가지고 있다. 유사한 사건들이 과거와 현재를 오묘하게 반복하며 이어진다.

자녀들은 부모가 경험한 일들을 스스로 실제 경험을 해보기 전까지는 애써 무시하거나 모른 척 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먼저 살아온 세대가 경험한 성공과 실패를 나중에 살아가는 세대들이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는 불필요한 일이다. 기성세대의 경험을 받아들이고 참고하면 실패를 줄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성공은 공감능력이 높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저녁 해질 무렵 간편한 차림으로 모처럼 한강고수부지를 한가롭게 산책한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불어오는 바람은 지난 무더웠던 여름의 바람이 아니다. 일교차가 커서 한낮에는 후덥지근하지만 해넘이가 되면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조만간 본격적으로 가을이 시작되면서 이제 찬바람이 곧 불어올 것이다. 왜 이렇게 계절에 민감하게 반응을 하는지 알 수 없다. 현재는 매우 즉각적이고 원색적이며 기다림이 없는 사회이다. 아무리 급격한 변화에 힘들지라도 참을성을 가지고 차분하게 기다리는 지혜로운 삶이 바람직하다.

화단에는 별을 닮아 아름다운 보라색 아스타가 화려하게 피어났다. 옆에서 나팔꽃이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쑥부쟁이가 구절초와 함께 바람에 하늘거리는 모습에서 가을이 가까이 다가왔음을 알려준다. 꽃을 찾아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꿀벌의 바쁜 날갯짓에서 미래의 희망을 본다.

활짝 핀 꽃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지금까지 견뎌낸 세월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듯하다. 가을 햇살을 안고 이는 바람에 마음이 따뜻하다. 따뜻함은 언어를 통해 나타난다. 좋은 말은 따뜻한 말로 격려해주고 지지해주는 말이다. 천진난만하고 순수한 손자의 입술에서 아스타의 진정한 믿음과 신뢰가 느껴지는 초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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