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윤희 수필가·전 진천군의원

풀잎에 하얀 이슬이 맺히기 시작한다는 백로다. 아침 일찍 어른들을 모시러 가는 길이다. 마을 어귀에서부터 그들이 정성들여 가꾼 꽃들이 맑은 이슬로 세수를 마치고 환하게 미소를 짓는다. 보랏빛 티셔츠를 갖춰 입은 어르신들이 집결 장소에 모였다. 소풍 떠나는 소년 소녀들이 따로 없다. 진천군에서는 버스 3대에 분승하여 청남대로 향했다. '2023년 세계 문해의 날 충청북도 기념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이다. 

하늘빛이 유난히 청명하다. 초록으로 야들야들하던 들녘은 어느새 누릇이 알곡을 여물리고 있다. 타들던 가뭄, 장마, 모진 풍파 다 견디고 숙연하게 익어가는 그들 자신이다. 청순하던 어린 날, 남들처럼 책보 들고 학교에 가고 싶었던 염원을 늘그막에 이뤄가고 있는 모습이 선들바람을 탄다. 

그저 한글 깨치는 것만으로도 족한 이, 초등학교, 중학교 인정과정을 거쳐 더 높은 상급학교 과정을 꿈꾸는 이 등 목표는 달라도 하나같이 자신감 있게 노후를 즐기는 이들이다. 

대청호를 끼고 돌아 청남대 잔디광장에 들어서니 잠자리 떼가 환영의 춤사위를 펼친다. 어디서 이리 몰려왔는지. 잠시 잊고 있던 어릴 적 추억이 나래를 펴고 잠자리 무리를 따른다. 

학교만 갔다 오면 책가방을 마루에 팽개친 채 들로 산으로 나돌았다. '나마리 동동, 파리 동동' 버들강아지 꺾어 휘휘 돌리며 잠자리를 유인했다. 용케 손안으로 들어온 잠자리는 꽁지를 자르고 풀잎을 꽂아 멀리 날려 보내곤 했다. 잠자리 시집 보내기다. 아득하게 멀어져간 유년의 꿈을 찾듯 청남대 행사장을 찾은 어르신들의 눈빛이 가을 하늘이다.

9월 8일은 세계 문해의 날이다. 문맹 퇴치를 일깨우기 위해 유네스코가 1967년부터 기념일로 제정했다. 그날 유네스코에서는 '세종대왕문해상' 수여를한다. 1989년 제정하여 개발도상국 언어 발전과 보급에 공헌한 개인이나 단체, 기관에 대한 시상이다. 상 이름에 세종대왕을 붙인 것은 배우기 쉽고 과학적인 한글의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중학 과정 교사로 참여하면서 교과서에 실린 것을 보고서야 알았다. 

충청북도에서는 '문해의 달 선포식을 겸해 11개 시군 문해 학습자들이 모여 행사를 가졌다. 시화전, 엽서 쓰기, 청남대 삼행시에 대한 시상식에 이어 장기자랑이 펼쳐진다.

'흙이 풀리는 내음새 / 강바람은 / 산짐승의 우는 소릴 불러 / 다 녹지 않은 얼음장 울멍울멍 떠내려간다.' //

오장환의 시 '고향 앞에서'가 나이 90을 넘긴 학습자의 목소리를 통해서 울멍울멍 흘러나온다. 시어로 녹아 있는 누룩 디디는 소리, 누룩이 뜨는 내음이 한으로 묻어난다. 진종일 나룻가에 서성거리며 가지 못하는 고향을 노래한 오장환 선생의 마음이, 한 노인의 가슴으로 들앉았던가 보다. 그리 가고 싶었던 학교를 가지 못하고 언저리를 서성이던 여인이 노을빛 곰삭은 목소리로 휠체어에 앉아 토해 놓은 시 한 수에 코끝이 찡하다.

문해교육이란 무엇인가. 글자를 깨치지 못한 것만이 문맹이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세계에서 문맹률 1%이라는 우리나라가 실질 문맹률은 OECD국가 중 꼴지라 한다. 실질문맹률이란 산문, 문서, 수량을 읽고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책을 읽지 않는 책 문맹도 꼴지란다.

 글자를 안다는 이유로 우리는 얼마나 글을 멀리하고 있는가. 유창하지는 못할망정 책을 가까이하며 유년의 꿈을 이뤄가는 저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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