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용운 지사, 퇴비 사후관리 철저 지시

吳龍雲(오용운) 충북지사는 2일 하오 堆肥(퇴비) 사후관리 철저 등 食糧(식량) 增産(증산)에 따른 當面(당면) 施策(시책)을 마련, 市(시)-郡(군)에 지시하는 한편 市長(시장)·郡守(군수)는 邑(읍)-面(면)-洞(동)을 수시 순시, 확인하여 事業(사업) 推進(추진)을 강력히 밀고 나가도록 하라고 촉구했다.

吳 知事(지사)는 이 指示(지시)를 통해 “완숙 堆肥는 비료분이 손실되지 않도록 퇴비사에 전량 移積(이적) 할 것과 퇴비사가 없는 農家(농가)는 비닐·이엉 등으로 덮어주고 미숙 堆肥는 뒤집기를 자주하여 완숙 시용에 지장이 없도록 하라”고 강조했다.

吳 知事는 또 “麥類(맥류) 播種(파종)은 오는 20일까지 모두 완료할 것과 농가별 맥기비수요량을 신속히 策定(책정)해서 邑-面長(면장)은 適期(적기) 供給(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8806호·1973년 10월 4일자 1면>

 

퇴비는 이 당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우리나라 국토는 매우 척박한 상태였다.

‘우리강산 푸르게’를 실현시키기 위해 벌거숭이 민둥산에 나무를 심던 녹화사업은 이후 전 세계가 주목할 만한 성과로 나타났는데, 이와 병행해 공을 들인 것이 퇴비를 만들고 뿌려 척박한 토양을 기름지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변에 무성하게 자라는 온갖 풀들을 베어 쌓아놓은 뒤 인분(人糞)과 우분(牛糞) 등을 끼얹어 퇴비를 만드는 일에는 시골 초등학생들까지 동원됐는데, 그때 낫질을 하다 왼손 검지를 깊게 베었던 상처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

50년 전인 1973년 9월 23일자로 17대 충북도지사로 임명된 오용운씨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3선 국회의원을 지냈다. 1926년 12월 14일 충북도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 출생, 2005년 12월 18일 79세로 사망.

그는 1926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 인산리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육군사관학교 7기 출신으로 대한민국 육군 장교로 군생활을 시작한 그는 육군수송감 등을 역임하고 197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1971~1973년까지 철도청장을 역임했는데, 1973년 9월 전임 지사였던 태종학씨가 경질되면서 충북도지사에 임명됐다. 당시 도지사와 시장·군수 등은 관선제였다. 국회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1976년 10월에 지사 직을 사임했다.

1978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후보로 충북도 진천·음성·괴산군 선거구에 출마해 신민당 이충환 후보와 동반 당선됐다. 이후 민주공화당 충북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출범하자 정치규제를 당했다가 1983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됐다. 전두환 정권 때는 낙향해 소를 키웠다고 한다.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주공화당 후보로 청주시 을(현 흥덕구, 서원구)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러나 1991년 수서 비리 사건으로 같은 당의 김동주, 이태섭 국회의원과 평화민주당의 이원배, 김태식 국회의원과 함께 기소돼 구속됐다.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연합 후보로 충북도 청주시 흥덕구 지역구에 출마해 통합민주당 정기호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3선 의원이 됐다.

/김명기 편집인·논설위원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