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수필가

가로수의 잎이 순해졌다. 그 아래를 걷는 걸음도 순하다. 산으로 돌린 걸음은 어느덧 솔향이 가득 내린 오솔길에 들어섰다. 미소가 절로 생기고 코는 연신 향을 들이기에 바쁘다. 깊은 산으로 들어가는 산모롱이에선 두 팔이 절로 벌어진다. ‘꽃은 산의 뜻대로 기뻐하고 새는 숲의 넋처럼 노래한다.’란 운초 김부용의 시가 작은 새의 지저귐처럼 절로 나온다. 산이 나를 반기는가, 내가 산을 반기는가.

5월의 숲에서 윤기 자르르 도는 나뭇잎을 올려보다가 눈을 내렸을 때 눈에 든 아기 붓꽃, 그 여린 꽃을 보며 냈던 탄성이 기억에서 사라질 때쯤 성 하의 산엔 더 샛노란 아기 원추리가 피었다. 걸음을 떼지 못하고 쪼그리고 앉아 눈을 맞췄다. 짙푸른 원색으로 위협하던 여름 산도 어느새 간색이 되고 있다. 바람이 부는지 후득 후드득 상수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여기저기 겅중거리며 걷던 다리가 아프다는 핑계로 초콜릿이라도 하나 꺼내 먹는 시간은 잎사귀 너른 갈참나무 잎과 이야기하는 때다. 멀리 산자락에 걸린 하얀 구름도 보는 시간이다. 그런 시간에 신경림 시인은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단다. 잠시 그 산으로 마음 나들이한다.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지막히 엎드려 있고/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되어 주기도 한다 (중략)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라고 시인은 말한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란다. 작은 나무 큰 나무, 작은 잎 큰 잎이 어우러지고, 굽은 나무 곧은 나무 가리지 않고 새는 둥지를 튼다. 빽빽하게 채울 줄도 알고 때가 되면 버릴 줄도 알아 가을이면 헐거워지는 산, 어느 때든 찾아오면 수많은 이야기를 소리 없이 들려주는 산이다.  -신경림, ‘산에 대하여’-

젊은 날엔 산꼭대기에 올라 소리를 질렀다. 나만 실수하고 사는 듯, 나만 초라한 듯, 나만 꿈을 못 이룬 듯, 나만 든든한 배경이 없는 듯, 서럽고 부끄러워 도살장에 끌려가는 황소처럼 울었다. 이젠 직선으로 하늘을 향하던 몸이 늙은 산처럼 구부러진다.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하고 까칠하던 마음에 ‘무엇이 중한디’란 한마디 말이 슬그머니 들어왔다. 가끔 곧추서려는 자존심도 새끼손가락을 스치고 가는 바람처럼 보낸다. 숟가락도 가벼운 것으로 옷도 가벼운 것으로 가방도 가벼운 것으로 지닌다. 벗기 좋게 내려놓기 좋게.

인연이 오면 연을 걸고 가는 친구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낸다. 아름드리 느티나무도 손가락 같은 젓가락 나무도 세월이 가면 눕고, 후박나무 너른 잎도 싸리나무 여린 잎도 내린 후엔 흙이 된다고 알려주는 산이다. 스승이면서 친구이고 나 자신이면서 너 같아서 좋다.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인다. 내 숨과 네 숨이 하나 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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