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이희영 배재대학교 기초교육부 교수

추석은 본디 한 해 동안의 농산물을 수확하고, 그것을 주변과 나누며 즐기는 감사의 시간이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는 속담이 우리 역사에서 추석이 가지고 있었던 넉넉함을 증명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농경사회는 아님에도 모두가 넉넉히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있는데, 이것은 추석 연휴 인사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넉넉하고 풍성한 추석을 보내라는 인사가 그것이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올해 추석 연휴동안 가까운 사람들과 이런 따뜻한 인사를 나누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내게 이런 인사를 가장 많이 건넨 사람들은 주변에 가까운 사람들이 아니었다. 거리에 도배되어 있는 플래카드였다. 지자체의 국회의원, 시장, 구청장, 군수, 시의원, 구의원…. 이뿐 아니다. 前시장과 前구청장, 혹은 지난 선거에서 낙선한 후보, 앞으로 정치에 뛰어들 각오를 다지는 어느 변호사나 어느 위원회의 자문위원까지, 별의별 직위를 달고 있는 이들이 나의 풍성한 추석 연휴를 기원해준다. 하루는 집에서 학교까지 10km가 채 안 되는 출퇴근길에 마주하는 추석 연휴와 관련한 플래카드 개수를 세어보았는데, 108개였다. 수신 거부도 되지 않은 스팸 문자를 대량으로 받는 느낌이다. 고맙긴 한데 이젠 지나치다 싶다.

플래카드 한 개를 제작하고 게시하는 데에 드는 비용이 대략 10만원이라는데 도대체 이 추석인사에 사용된 비용이 전국적으로 얼마일지 한숨부터 나왔다. 그 비용은 아마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되는 정당국고보조금 혹은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정치후원금으로 마련되었을 것이다. 10km 거리에 100개 이상의 플래카드를 게시할 비용을 모아 차라리 지자체에 어려운 이웃들이 넉넉한 추석을 보낼 수 있게 도움을 주었다면, 내 세금과 정치후원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정치인들의 플래카드 남발의 기미는 작년부터 보였다. 2022년 12월 11일, 헌법상 정당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통상적 정당 활동으로 설치한 플래카드는 옥외광고물 법률 및 시행령의 규제를 배제하도록 한 법률이 시행된 것이 계기였다. 법에서 정한 통상적 정당 활동의 범주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모르겠으나, 법률 시행 이후 국민들이 살고 있는 삶의 공간은 온갖 정치 플래카드로 둘러싸이기 시작했다. 여야의 플래카드 정치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공허한 구호를 남발하는 플래카드, 상대방을 비방하는 날 선 플래카드, 선심성 공약을 남발하는 플래카드로 온 도시에 정치인들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살벌한 문구로 가득 찬 플래카드가 도시의 미관을 해치며 난립하고 있는 것을 보다보면 공해라는 단어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민생에 대한 관심도 정치인으로서의 신념도 없이 오로지 정당이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고 다툼을 일삼는 정치의 민낯이 곳곳에 전시되고, 그것을 보는 국민들은 이것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의 정치 수준인가 싶어 부끄럽다.

정치란 본디 권력을 향한 끝없는 다툼이라지만 그 사이에 전제되어야 할 것은 국민들의 인간다운 삶의 영위이다. 이를 위해서 부디 넉넉한 추석의 마음으로 정치를 하시길 바란다. 그리고 제발 정치 플래카드를 걸 때는 보통의 국민들처럼 시군구에서 지정한 현수막 게시대를 적극 활용해주시길 간곡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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