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가을이 시나브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날씨가 쌀쌀하다. 서늘한 가을바람이 불어오는 들판에는 꽃들이 저마다 형형색색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강화도 해변에서 바라보는 맑고 파란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이 황홀한 가을낭만을 선사한다.

불볕처럼 뜨거웠던 여름 햇볕이 내리쬐던 자리에는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바람과 함께 살포시 내려왔다. 초록의 나뭇잎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노랗고 빨간 단풍으로 서서히 옷으로 갈아입는다. 감홍난자(酣紅爛紫)라는 말처럼 가을이 깊어갈수록 울긋불긋하게 단풍이 한창 무르익어간다.

가을빛이 가득한 산책로에 들어서니 영혼이 맑아지는 기분이다. 산과 들에서 진한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가슴에 스며든다. 그리움이 깊어지면 꽃이 된다고 했던가. 각양각색의 가을꽃이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사이사이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이 가을바람을 타고 찾아와서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을꽃은 자연이 가져다준 큰 축복이다. 기나긴 세월을 지나오면서 참고 견뎌낸 고통의 흔적들을 포근하게 감싸안아준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을 스치듯 살랑살랑 불어오는 순간 고단한 세월의 아픔이 위로받는 느낌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선수들의 분전(奮戰)이 큰 감동을 가져다주고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특히 29년 만에 아시안게임 배드민턴 여자단식에서 우승하면서 단체전까지 2관왕을 달성한 방년 21세의 안세영 선수가 만들어낸 멋진 드라마가 오랫동안 가슴에 남는다. 심한 무릎 부상에도 불구하고 상대의 계속적인 공격을 끈질기게 받아내고 참아내면서 승리하는 장면에서 아름다운 감동을 느꼈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 놓일지라도 침착하게 받아들이며 참고 견뎌낼 수 있다면 원하는 꿈을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안타까운 사랑이야기이다. 오르페우스는 리라연주를 잘하는 아주 탁월한 음악적 실력을 갖춘 음유시인이다. 갑자기 사랑스런 아내 에우리디케는 독사에게 물려 세상을 떠난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잃어버린 슬픔으로 괴로워하다가 저승까지 아내를 찾아서 길을 나선다. 여러 관문을 리라연주로 감동을 주고 무사히 통과하여 저승에 들어가게 된다. 마지막 저승의 신 하데스는 리라연주와 노래에 감동을 받아 지상세계에 도달하기까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는 조건으로 에우리디케를 데리고 지하세계를 떠나게 한다.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데리고 이승에 도착하는 마지막 순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힘들게 왔는데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잡았던 에우리디케의 손을 놓치면서 아내는 이승에 들어서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이별을 하게 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사랑이야기는 후에 많은 화가들이 그림을 그렸는데 프랑스 화가 카미유 코로의 그림이 대표적이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세상적인 영광을 본다는 의미도 있지만, 약속을 지키지 못한 참을성 없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보여준다.

끝까지 참고 견디지 못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자주 볼 수 있다. 특히 정치, 문화 등 분야에서 야망을 품은 사람들이 평소 본분을 지키거나 욕망을 절제하지 못하여 스스로 꿈을 포기하거나 현장에서 사라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공동체에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갖춰야 할 중요한 덕목은 무엇일까?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참고 견디는 힘이다. 아무리 좋은 생각이나 나름 전략을 가지고 있더라도 참고 견뎌내는 능력이 없다면 고난의 시간을 극복할 수 없다.

견뎌내는 능력은 끝까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붙잡고 해내거나 해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능력과 육체적인 능력이 함께 있을 때 소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정신적인 힘 못지않게 육체적인 힘을 키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평소 규칙적으로 계단 오르기나 걷기 운동만으로도 점차 근육이 늘어나고 체력이 향상되면서 육체적인 힘을 갖게 된다. 더불어 체력이 좋아지면서 자신감이 생겨나서 참고 견뎌내는 내적능력이 강화된다.

요즘 친구들과 지인들을 만나 대화를 나눌 때 자주 거론되는 공통의 화제가 있다. 인간관계에서 부딪치는 문제에 직면할 때 참고 견뎌내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고 한다. 삶의 과정에서 참아내고 견뎌내야 할 문제들이 많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먼저 말을 아끼면서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고 참아내고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반복적인 실수를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할 말이 있다면 간결하고 명료하게 말을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상대방의 말에 끝까지 귀기울여주고 공감할 때 한결 분위기가 나아진다.

이생진 시인의 ‘숲속의 사랑’이라는 시의 일부이다. ‘거센 바람이 시기를 한다. 사랑은 언제나 약한 풀꽃. 그러나 바람은 사흘을 못가니. 참아라, 그러면 네가 이기리라.’ 거센 바람에 순응하며 흔들리는 가냘픈 풀꽃의 모습에서 삶의 의지를 찾아볼 수 있다. 거센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을 바라보며 참고 견디기 어려운 현실을 위로받고 용기를 얻는다. 폭풍이 내려치는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의 모습이 인간의 모습과 다름이 아니다.

파란 하늘이 담겨 더욱 투명하고 깊어지는 단풍으로 물들어가는 나뭇잎이 눈부시게 아름다운 가을이다. 울타리처럼 가지런하게 서 있는 탱자나무 줄기에 매달려 있는 노란 탱자 열매의 시고 상큼한 맛이 어릴 적 추억으로 친근하게 다가온다. 사랑한다는 말 대신 소박한 탱자 향기를 보내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무는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가장 화려한 붉은 색깔로 물들어간다. 삶의 이유였고 전부였던 것들을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정하면서 화려한 절정에 다가서는 것이다.

절벽을 타고 올라갈 때 어느 자리에 발을 놓고, 어느 자리에 손을 옮겨 놓고 어떻게 붙잡으면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하고 준비한다. 나름의 방법으로 잘 올라갈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여도 벼랑 끝에서 견뎌낼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참고 견뎌내는 능력이 중요하다.

현재를 충실하게 보내면 과거를 달콤한 꿈으로 미래를 희망에 찬 환상으로 만들 수 있다. 무거워지는 몸에서 세상적인 욕망을 하나씩 하나씩 내려놓고 참고 견뎌내면서 인간 본연의 거룩한 열망 찾아 가슴에 담고 싶은 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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