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이희영 배재대학교 기초교육부 교수

인문학에 불어 닥친 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걱정은 이제 지루한 이야기이다. 실제로 현대인들에게 인문이나 예술이라는 단어는 여유가 있는 삶에 누리는 옵션,누군가에게는 경우에 따라 사치품이 되었다.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알겠지만 먹고사는 일 만큼은 아니라는,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일이니 돈을 벌고 난 이후에 향유해야 할 것들이라는 인식.형편이 허락하지 않는데 인문학을 즐기는 건 말 그대로 ‘낭만’이 된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는 대학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학문의 가치는 취업률이나 중도탈락률,입학충원율 같은 정량 지표로 평가된 지 오래이다.학문의 특수성이나 학과 구성원들의 의지와는 별개로 몇몇의 숫자만으로 학과의 존폐가 결정되는 일은 이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다. 인문학의 가치를 몰라주는 사회에 대한 원망은 차치하자.중요한 것은 인문학이 자리를 잃어가는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인문학이 자리를 잃어가는 이유를 꼽아보았을 때,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인문학은 인문학 그 자체로 콘텐츠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디지털 사회로의 적응 실패를 의미한다. 90년대 후반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된 시기로부터 25여 년,2000년대 후반 스마트폰이 등장하고부터 15여 년이 흐른 지금의 사회는 그야말로 디지털 사회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이미 디지털 사회인 현재를 디지털 대전환의 시기로 명명하며,더욱 더 디지털화된 사회를 요구하고 있다.

정부의 예고대로라면 곧 다른 차원의 디지털 사회가 열리고, 화려한 실감미디어 기술이 공간을 새로이 재편할 것이다.그 속에서 인간은 지금과 다른 방식의 디지털 콘텐츠를 마주하게 될 것이다. 연극이 드라마나 영화가 되고 만화가 웹툰이 될 때,미술이 실감 기술이 되고 음악이 종합 예술 공연이 될 때,인문학, 특히 문학과 사학, 철학은 그러지 못했다. 우리 사회 인문학의 정체성이 문사철에 있다는 외침이 공허해지는 이유이다.

이러한 시대 흐름 때문인지 오늘날의 현대인들은 ‘알쓸신잡’이나 ‘차이나는 클래스’ 같은 인문학 프로그램을 즐겨보지만 실제 책을 읽고, 스스로 공부하진 않는다. 시간을 내어 천천히 여행하며, 사색에 잠기지도 않는다. 그들은 여러 콘텐츠로 인문학을 즐기지만 깊이 있게 탐구하진 않는다. 그저 내가 인문학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그 정도면 된다. 그러므로 현대의 학생들은 철학이나 문학을 좋아하더라도 철학과나 국문학과로 진학하지는 않는다. 그 선택 뒤에는 인문학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고난 뒤, 본인의 삶이 경제적 안정을 얻은 뒤에 취미 생활로 향유해도 늦지 않다는 사회의 가르침이 있었을 것이다.비극적이지만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 인문학, 특히 문학과 사학과 철학의 현실이다.

문제는 인문학, 특히 문사철의 쇠퇴가 우리 사회의 ‘탐구하는 인간의 부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콘텐츠를 향유하지만 탐구하지는 않는다. 많은 시간, 그저 살아간다. 이유도 모른 채 경쟁에 내몰리고, 타인의 눈을 의식하며, 그럴듯한 삶을 살기 위해 애쓴다. 남는 시간엔 다시 공허하게 콘텐츠를 향유한다. 이러한 공장제 삶으로 가득한 사회에서 개인의 주체적 행복은 요원하다.

우리 사회에 인문학의 회복이 필요한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은 탐구하는 인간을 회복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주체적으로 행복해야 하고, 그를 위해서 인간은 탐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학과 사학과 철학은 인류가 그동안 기록해 온 수많은 삶의 기록이라면, 그 속에는 분명 수많은 인류의 주체적 사유가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까닭에 삶에 있어서 인문학을 뒤로 미뤄놓는 선택은 행복을 뒤로 미뤄놓는 일이 된다. 이 글을 읽는 이들은 부디 그런 선택을 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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