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구순을 바라보는 친정어머니와 병원에 갔다. 젊어서부터 늘 앓는 소리를 내고 사시던 어머니다. 다행히 특별히 걱정되는 질병은 없으시고, 3개월에 한 번씩 심장 약을 타러 정기적으로 병원에 가신다. 팔십 중반까지만 해도 딸들과 함께 여행을 즐기시던 어머니는 구십이라는 숫자 앞에서 꽤 당황하신 듯하다. 그러면서도 한편 ‘삼십 년 전 사별한 남편 몫’까지 사는 거라며 백 세 인생을 기대하신다.

의사가 눈인사하며 어머니를 반갑게 맞이한다. 의사는 환자를 오래 살게 해주는 사람이라는 말에 어머니 굽어진 허리가 의사 쪽으로 바짝 기운다. 자식이 일곱이나 있어도 어머니에겐 의사가 제일 믿음직스러운 상대인 듯했다.

‘애들이 홍삼을 사 왔는데 그런 거 먹어도 돼요?’ 건강식품이라고 좋아하셨던 어머니다. 의사는 어머니를 보고 웃으며 ‘저는 제 돈 주고는 안 사 먹어요, 그러나 누가 사 오면 그냥 드세요’ 그러면서 어머니 안색을 살핀다. “할머니 파마가 잘 나왔네요. 염색도 꼼꼼하게 되었고요. 아이구, 반지도 세 개나 끼셨네, 팔찌도 번쩍거리고요. 분홍 입술이 고우셔요. 할머니는 몸을 곱게 가꾸시는 분이라 오래 사실 거예요” 그런다. 자기 외모를 가꾸는 사람은 삶에 의미를 두는 사람이기 때문에 쉽게 죽지 않는다는 말이다. 많은 환자를 본 의사의 경험담일 수도 있다.

빅터프랭클이 생각난다. 아우슈비츠 감옥에서 아내와 가족이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견디어 내고, 삶의 의미, 살아가는 목적을 찾기 위해 노력한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사람은 영적이고 육체적인 스트레스의 끔찍한 조건에 놓여도 정신적 자유와 마음의 독립성을 보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빅터프랭클은 짐승처럼 갇혀 있는 상황에서도 커피 반 잔을 옷에 묻혀, 이를 닦고 사금파리를 주워, 면도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는 형형한 눈빛으로, 죽을 자를 선발하는 독일군의 지명을 피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다른 모든 것은 사람에게서 빼앗을 수 있지만 단 한 가지 빼앗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방식을 선택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는 마지막 자유이다.”라고 말한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아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을 발간하고 ‘스스로 행복하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하라’는 ‘의미치료’를 만들었다.

아직도 수줍은 미소를 짓는 어머니는 한결 기분이 좋아진 채, 반짝이는 분홍색 운동화를 내려다보며 백세를 향한 마음을 숨기시는 듯했다. 살아오면서 이렇게 잘 산 적은 없다는 말로, 요즘 행복하다는 표현을 하신다. 전쟁과 가난과 남편의 사별을 맞바람으로 버텨낸 어머니는 죽음이 달갑지 않으신 듯하다 “요즘은 다들 백 살까지 사는 게, 약이 좋아서 그려”하시며 3개월 후 병원 방문일을 다시 짚어 보신다.

집에 돌아와 외출복을 정리하시는 어머니 굽은 허리가 날렵하다. 혼자 사시는 독거노인이지만 집안은 언제나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다. 현관 앞 계단에서 화분도 가꾸시고 텃밭에서 채소도 가꾼다. 칠 남매가 번갈아 청소도 하고, 요양보호사가 방문하여 어머니 수발을 하지만, 아직도 어머니는 자식이 문 열고 들어오면 습관적으로 부엌으로 가신다. 자식들 먹이는 일은 어머니에게 평생을 살아온 의미이기 때문일 것이다. 텃밭 총각무가 굵어지면 김치 버무려 놓고 전화하실 것이다. 어머니 화장대를 훑어본다. 빨간 립스틱이 필요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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