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이희영 배재대 기초교육부 교수

인류는 여러 번에 걸친 문명사적 진화를 마주하며 지금에 이르렀다. 특히 몇 차에 걸친 산업혁명은 인류의 삶의 변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였고, 인류는 더욱 번영했다. 그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 세계 인구 통계이다.

농업혁명이 일어났다는 기원전 7,000년 전 즈음에 세계 인구는 약 240만 명 정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라 일컬어지는 현재, 세계 인구는 80억 4천 5백만 명을 넘어섰다. UN인구보고서에 따르면 2037년에는 90억 명을 넘어설 것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구 증가의 원인은 누구나 예측하듯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인류의 생활 수준의 향상이다. 속된 표현으로 먹고살 만해질수록 출산율은 높아지고, 사망률은 감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인구 통계에 이상 현상이 발견되었다. 몇몇 국가에서 인구 증가세가 완화되는가 싶더니, 어느새 실질적 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소위 말하는 선진국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이는 인간이 지금껏 지구상에서 존재해 온 생물과는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본디 모든 생물은 왕성한 번식을 욕망한다. 개체수를 늘리고 좀 더 많은 지역에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 역사를 돌아보았을 때, 인간 역시 이러한 자연적 욕망에 순응하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현대의 인간은 그 자연적인 욕망을 거스르는 존재가 되었다. 피임이나 낙태, 자살 등 다른 생물 종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행동이 그것을 증명한다.

이러한 선택에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빠르게 변화해야 하는 사회에 적응하고 먹고 사는 일이 급하니 번식에는 신경을 쓸 여력도 없었을 수도 있다. 기술은 여전히 발전하고 생활 수준 역시 지속적으로 높아지고 있는데 내 삶은 그렇지 않다고 느꼈을 수도 있겠다. 종합하면, 현대 사회가 더 이상 먹고살 만한 사회가 아니라는 뜻이다.

슬프게도 이러한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곳이 한국이다. 한국의 인구 감소율은 전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울 만큼 드라마틱하다. 2023년 합계 출산율은 또 다시 역대 최저치를 경신할 전망이고, OECD 국가 자살률은 여전히 세계 1위이다. ‘자살 수치는 그 사회의 건강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라는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이러한 사회적 지표들은 우리 사회의 어느 부분이 심하게 아프다는 것, 더 나아가서는 한국 사회가 참 먹고살기 참 힘든 곳임을 증명한다.

필자는 가끔씩 학생들에게 자신이 살아 있어서 기쁠 때가 언제인지를 묻는다. 슬프게도 그것에 대답하는 학생들이 점점 줄고 있다. 오히려 지금도 먹고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할 때도 있다. 어떤 학생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지가 아닌, 왜 먹고 살아야 하는지를 되려 질문하기도 한다. 그뿐 아니다. 연애와 사랑을 포기하는 학생들은 늘어가고 있다. 인간관계의 피로함을 호소하는 학생들이 증가하고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국 전쟁기와 경제 성장기를 거쳐 온 어른들은 요즘 시대 먹고 사는 일의 어려움에 대한 토로를 들으며, 정말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지도 모르겠다. 삶은 그냥 사는 것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산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가치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많은 것들이 자연스럽게 주어진 현대사회는 그만큼 많은 것들을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기쁜 것도 특별히 슬픈 것도 없는 무감각, 사실은 그것이 비극이다. 그렇기에 오늘 날의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한 고민은 경제적인 안정에 대한 고민을 넘어서야 가능하다. 오히려 급한 건 생의 무감각을 깨우고 삶의 가치를 찾는 일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생각해보시기 바란다. 살아 있어 기쁜 날이 언제였는가? 자신의 삶의 가치는 어디 있는가? 이 해답이 있어야 먹고 사는 이유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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