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갑자기 비가 내리더니 날씨가 추워졌다. 아침 양재천변 산책길을 걸어가는데 비에 축축하게 젖은 낙엽이 신발 바닥에 달라붙어 불편하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에서 벌써 겨울이 다가왔음이 느껴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은행나무에 매달린 황금빛 잎사귀가 눈을 즐겁게 하고 바닥에 쌓인 낙엽이 푹신푹신한 느낌을 주었다. 가을이 눈부시게 왔다가 불어오는 찬바람에 소리 없이 점점 멀어진다. 나뭇잎이 언제 단풍으로 물들었는지 언제 바닥에 떨어졌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이 세월이 저만치 흘러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은 미련으로 가을을 붙잡고 낙엽은 바람에 날리며 겨울을 재촉한다.

지난 시월 마지막 주말 친구들과 함께 한강 미사리 수변공원을 찾아 가을 정취에 흠뻑 취했다. 높고 푸른 하늘이 유난히 맑고 깨끗하다. 주변 가을 풍경이 고혹할 만한 아름다운 자태를 발산하고 있다.

붉은 단풍으로 물든 곧게 뻗은 메타세쿼이아 숲길에서 내뿜는 소박한 나무 향기가 가슴속에 잔잔하게 밀려든다. 초승달처럼 기다랗게 누워있는 작은 섬에는 큰 고니와 청둥오리 등 수십 종류의 철새들이 찾아왔다. 겨울을 나기를 위해 날아와서 편안하게 쉬는 모습에서 자연의 신비를 깨닫는다.

강가에 끝없이 펼쳐진 억새밭 사이에 들어서는 순간 은빛 바다에 풍덩 빠져든 착각이 느껴진다. 부드러운 바람에도 한없이 쓰러지고 가벼운 햇살에도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가 산처럼 바다처럼 포근하게 안아주는 듯하다.

순자(荀子) 권학(勸學)편에 나오는 마중지봉(麻中之蓬)은 봉생마중 불부이직(蓬生麻中 不扶而直)에서 취한 것이다. 보통 쑥은 똑바로 자라지 않지만, 곧게 자라는 삼과 함께 있으면 붙잡아 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삼을 닮아 가면서 똑바로 자란다는 뜻이다. 하찮은 쑥도 삼과 함께 있으면 곧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사람도 어진 이와 함께 있으면 어질게 되고 악한 사람과 있으면 악하게 된다. 군자는 거처를 정할 때 반드시 마을을 살피고, 사람과 교유할 때는 반드시 곧은 선비와 어울려야 한다는 말씀이 새삼 떠오른다. 그만큼 살아가는데 주변 환경이 중요하다는 것을 함축하여 알려준다.

최근 유명 연예인의 마약 의혹과 스포츠 스타의 사기 연루 의혹 사건이 연일 언론과 방송에 보도되면서 세상의 이슈를 블랙홀처럼 한순간에 빨아들이고 있다. 이들의 행동은 지금까지 작품과 올림픽 투혼에 많은 감동과 위로를 받았던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실망과 충격을 안겨주었다. 일반인들에게도 예외일 수 없는 일이나 사건들이 얼마나 황당하게 벌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다.

자신의 본분이나 중심을 지키지 못하면 길을 잃게 된다. 무엇인가를 덮기 위한 음모론이라는 일부 정치적 의견도 있지만 정작 대다수 국민들은 이런 논란을 접하는 상황이 불편하다.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이런 사건들에 오래 관심을 두지 않을 만큼 충분히 성숙해졌다.

스페인 철학자 발타자르 그라시안은 사람을 쉽게 믿지도 사랑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쉽게 믿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판단력이 성숙하다는 뜻이다. 친구를 사귀는 일을 우연에 맡기지 말고 스스로 잘 선택해야 한다. 쉽게 믿는 사람이 금방 수치를 당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요즘 거짓말이나 가짜 정보가 횡행하여 이제는 믿는 일 자체가 특별한 일이 되어버린 세상이다. 현명한 사람은 성찰을 통해 충동적인 어리석음을 미리 막아낼 수 있다.

얼마 전 중견기업을 운영하는 후배를 오랜만에 만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자리를 가졌다. 최근 세계적인 인플레이션 전쟁으로 경기침체가 지속되어 급격한 경영환경 변화에 대비하기 위한 조직을 구성하려고 하는데 적합한 직원이 눈에 띄지 않아 걱정이라고 한다. 또한 내년 총선을 앞둔 정치권에서는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려는데 마땅한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는 말이 들려온다. 능력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나서려 하지 않고, 주변을 기웃거리는 사람들은 눈에 들지 않으니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정치권이나 기업을 비롯한 많은 분야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재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는 사실은 정설이다.

세종대왕이 강조하였던 국정철학 중 하나인 득인위최(得人爲最), 이위하여(以爲何如)는 ‘인재를 얻는 것이 최우선이며,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라는 뜻이다. 지연이나 학연이 아니라 덕망과 재능으로 인재를 구하고, 물음으로 상대의 말문을 열어 의견을 구하여 좋은 해법을 국정에 반영하였다. 널리 인재를 불러 모으는 일보다 능력을 실제 활용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진짜 금은 도금하지 않고, 훌륭한 사람은 스스로 이름을 팔지 않는다. 아름다운 사람은 문밖에 나가지 않아도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은 법이다.

고개를 들어 문득 하늘을 쳐다본다. 하얀 구름이 수놓은 멀고도 깊은 눈빛 하늘이 눈부시다. 인생은 고통이며, 고통은 집착에서 비롯되고, 집착을 버림으로써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반짝이던 별들이 빛을 발하다가 가장 어두운 밤하늘로 향한다. 잊히고 사라질 것 같은 별이 다시 초신성이 되어 지금까지 보여준 것과 다른 빛깔로 빛난다. 언제 빛을 다할지 가늠할 수 없지만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다. 대자연의 섭리가 경이로울 뿐이다.

해가 바뀌고 계절은 순환을 계속한다. 따사로운 햇빛과 푸르른 초목은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가을을 지나가고 사그라지듯 겨울을 향하여 나아간다. 길바닥에 나뒹구는 낙엽이 눈에 밟힌다.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든 것은 중심이 있다. 완벽하여 삶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묵묵하게 중심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이 아름다운 것이 아닐까 싶다. 미완성의 삶이 있다면 아직 완성할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모든 가치 있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스스로를 끊임없이 개혁하여 지나치게 모자람이나 치우침이 없는 곧고 올바른 삶을 꿈꾸는 늦가을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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