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곽의영 전 충청대 교수

예로부터 ‘개천에서 용(龍) 난다’는 말이 있다. 이는 매우 열악한 환경에서도 끊임없는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을 일컫는다.

우리 고장 출신으로 개천에서 난 용(龍)하면 다음의 두 인물이 떠오른다.

바로 세계적인 성악가(베이스:bass) 연광철과 용접공 출신의 교수 유영만이다.

연광철은 충주의 빈농(貧農) 아들로 태어나, 초등학교 때 학교 마치고 집에 가려면 산을 세 개나 넘어야 했다. 더구나 저녁에 캄캄해지면, 무서워서 노래를 불렀다.

그러다 중학교를 거쳐, 청주 공고에 진학했다. 재학 중에 그는 취업 관련 자격증 시험에서 떨어져, 늘 좋아하던 음악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소 팔아 준 돈으로, 청주대 음악교육과에 들어가 열심히 배우고 익혀, 국내 여러 콩쿠르에서 두각(頭角)을 나타냈다. 하지만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이를 위해 연광철은 단돈 700달러를 소지하고 불가리아 소피아 음대로 유학을 떠났고, 이어서 베를린 국립 음대를 졸업했다.

그 결과 1993년 ‘플라시도 도밍고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1994년부터 10년 간 베를린 슈타츠오퍼(국제오페라)에서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이러한 활동은 계속 이어져,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빈 국립 오페라 등 세계 주요 오페라에서 커리어를 쌓기도 하였다.

또한 연광철은 1996년부터 바그너 음악의 성지라 불리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100회 이상 공연을 해, ‘최고의 바그너 가수’라는 칭호를 듣게 되었다.

아울러 2018년에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독일어권 성악가 최고 영예인 ‘캄머쟁어(궁정가수)’ 호칭을 받기도 했다.

다음으로 교수 유영만은 충북 음성의 농사꾼 집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였다. 그 후 1년 간 농사를 짓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전기공고로 진학했다.

이 학교에서 그는 3년 간 용접 기술을 익혀 용접 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해, 평택 화력발전소에서 일하였다. 그런데 당시 근무형태가 4조 3교대라서, 3일 주기로 밤낮이 바뀌어 너무나 힘들었다. 때문에 쉬는 날엔 술만 마시면서 보냈다. 이러다 보니 과연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가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평생 땜질하며 살 것 같은 그의 삶을 바꾼 것이 있다. 그것은 한권의 책 ‘고시 체험생 수기’였다. 우연히 서점에서 집어든 이 책을 읽고 고시 공부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부가 자신의 길이 아님을 알고 중도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 대신 새로운 삶을 찾기 위해 선택한 것이 책이었다. 이때 유영만은 인문학, 철학, 문학 등 읽고 싶은 책들을 새벽 5시까지 읽었다고 한다.

이렇게 책을 파고들다 보니 왠지 대학에 가고 싶어 공부를 시작해, 한양대 교육공학과에 합격했다. 사실 그는 독학으로 준비해 기초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다행히 교육공학과가 신설학과라서 미달이라 가까스로 합격한 것이다.

이와 같이 시작한 공부는 대학 스승의 덕분에, 미국 플로리다 주립대학교의 유학으로 이어졌다. 이 대학에 다니면서 유영만은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버는 이른바 ‘주독야경(晝讀夜耕)’ 생활을 하여,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받은 후 그는 삼성인력개발원에서 근무하다, 안동대학교 교수를 거쳐 현재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야흐로 개천에서 용(龍) 나는 시대는 지났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계층 간 이동이 어려워지기에 말이다.

이 같은 현실에서 사교육(私敎育)이 실질적인 교육기관이 되어버려, 어려운 환경에서 자신의 꿈을 펼치기가 너무나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기에 사회적 제도와 교육 시스템이 획기적으로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 열심히 노력해 제대로 보상 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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