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정혜련 사회복지사

오랜만에 TV에서 대하사극을 보게 되어 반가운 마음에 찾아보니 ‘고려거란전쟁’이라는 KBS 드라마였다. 대하사극은 역사적 사실에 충실한 것이 미덕으로, 많은 인력과 자본이 필요한데, 협찬도 쉽지 않아 제작이 어렵다. 일본의 경우, NHK에서 매년 한편씩 꾸준히 제작되고 있고 시청률도 안정적인 편이다. 일명 고장극으로 불리는 중국의 사극은 배경이나 소재가 다양한 편이다. 사극 세트장이 잘 갖추어져 있고, 시장도 큰 편이다.

역사적으로 고려와 거란은 세 번의 큰 전쟁을 겪었다. 첫 번째는 993년 거란이 고구려의 옛 영토를 자신들의 영토라며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는 외교의 달인 서희의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두 번째는 1010년 거란이 세운 요나라의 성종이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서경(西京)을 침공하였다. 강감찬이 요나라에 항복하자는 다른 중신들에 반대하며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여 나주로 피난 갔고, 요나라군이 돌아가던 중 양규 장군이 요나라군을 뒤에서 쳐부수어 고려는 큰 승리를 했다.

세 번째는 1018년 요나라가 고려 현종이 친히 입조하지 않은 것과 강동 6주를 돌려주지 않았다 하여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때 강감찬은 상원수가 되어 부원수 강민첨과 함께 20만 8천 명을 이끌고 나가 곳곳에서 요나라군을 격파했다.

흥화진(興化鎭) 전투에서는 1만 2천여 명의 기병을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굵은 밧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았다가 적병이 이르자 막았던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는 전술로 혼란에 빠진 요나라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어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후퇴하는 요나라군을 추격하여 귀주(龜州)에서 적을 섬멸했는데, 이 전투를 귀주대첩이라 한다. 요나라군 10만 명 중에서 생존자는 겨우 수천에 불과하였다. 귀주대첩의 승리로 요나라는 고려와 전쟁을 포기하게 되었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 끝나면서 고려, 송나라, 요나라가 서로 대등한 관계에서 세력 균형을 이루었고, 국제정세가 안정되었다. 이 세 차례의 전쟁 이후 고려는 요나라의 제안대로 송나라 연호 대신 요나라의 연호를 사용하는 명분을 주고, 강동 6주라는 실리를 취했다. 송나라와는 표면적으로 외교는 단절했지만, 무역과 문화 교류를 지속하였다.

강한 애국심과 국력을 바탕으로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지혜롭게 대처하는 고려의 외교는 되짚어 볼수록 놀랍다. 현재 방영되는 고려거란전쟁에서는 고려 현종의 시대이기에 2차와 3차 전쟁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3차 전쟁은 귀주대첩이라 불리며, 거란이 고려에 대한 야욕을 꺾는 큰 승리의 역사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남북의 대치상황에서 한반도 위로는 중국과 러시아 아래로는 일본 그리고 태평양 건너 미국과 외교적 실타래가 엮여 있다. 애치슨 선언으로 미국이 한반도를 방위선에서 제외한 후 6·25전쟁이 일어났고, 당시 중공이 참전하여 통일이 무산되었다.

현재 미국은, 가혹한 일본 식민통치를 겪은 우리를 일본과 군사적으로 묶어,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려 한다. 중국과 러시아도 결코 우리 편이 아니다. 천년 전 고려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대등한 외교력으로 국가를 지켰다.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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