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흥덕 대교를 건너서 예술의 전당으로 가는 길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아직 가을이 절정인데 불쑥 겨울이 예고도 없이 일찍 왔다. 준비도 없이 맞이한 겨울은 옷깃을 여미게 하고 찬 바람은 노란 은행잎을 수북하게 보도에 깔아놓았다. 은행나무 가로수길을 걸어서 건강관리공단 사무실 방문을 했다.

번호표를 뽑아서 내 순서를 기다렸다. 단정한 여직원은 필자에게 조목조목 설명을 해주면서 컴퓨터 화면에 내용을 입력을 시키고 있었다. 내가 임의로 나의 생사 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을 상황일 때에 의료진이나 가족이 보고 결정할 수 있는 내용을 입력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질문에 “네네”라고 대답을 하다가 문득 “잠깐만요 그런데 왜 슬퍼지지요?” 여직원은 미소를 보이면서 “그럼요 다들 눈물 흘리시거든요” 라고 말하면서 잠시 후 같이 웃으면서 입력을 마무리했다.

이렇게 차일피일 미루던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 등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머리 위로 은행나무 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처음으로 나의 미래에 죽음의 시간과 직면한 시간이었다. 자연의 이치인 계절의 섭리와 나의 생에 가을과 겨울의 경계를 생각하면서 걸었다.

그 일을 잊고 있었던 어느 날 우편함에 들어있는 우편물을 개봉하니 ‘사전 연명 의료 의향서’라고 쓰여있는 카드가 설명서와 함께 들어있었다. 설명서 머리글에 “사람들은 겨우살이를 준비하면서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 는 톨스토이의 명언이 눈에 들어왔다. 웰다잉의 필요성을 한마디로 잘 함축한 말이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자주 마음에 머물렀었다. 나를 위해서 스스로 안전장치를 하나 했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졌다.

근래에 웰다잉 연구소나 웰다잉 지도사라는 분야가 사회적으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관심이 가는 분야였지만 특별히 시간을 내기가 쉽지 않아서 관련 서적 몇 권을 구해서 읽기 시작했다. 공부를 하면서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죽음이란 것을 직시하면서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은 현재의 나를 냉철하게 성찰하는 시간이었다.

웰다잉 잘 죽는 것 이전에 웰리빙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하며 잘 살아온 사람이 아름다운 죽음도 맞이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살아왔던 시간보다 남은 시간에 감사하게 생각하니 하루하루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얼마 전에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말기암에 걸린 아내가 의식도 없이 오랜 시간 고생을 하니까 그의 남편이 호흡기를 제거해서 사망케 하자 남편에게 살인죄를 적용했는데, 생전에 부인이 연명치료를 않기로 약속했다고 해서 존엄사 허용 취지의 판결을 받았던 사례가 있었다. 죽음 앞에서 자기 결정권을 존중하는 아름다운 삶의 마무리 모습이었다.

긴병에 효자 없다고 한다. 노년의 투병 생활은 제아무리 효심이 깊은 자녀라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버티기가 힘들다. 중환자실에서 회복 불가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죽음에 대해서 모르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 반면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 다섯 가지가 있다. 누구나 죽는다, 순서가 없다, 아무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그 누구도 대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미리 경험할 수가 없다. 문득 삶 자체에 겸허함을 갖게된다. 존재와 생명의 소중함,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삶 전반에 대한 감사함이다. 욕심도 비우게 되고 미워하는 마음도 버리게 된다.

긍정 심리학 분야에서만 연구되던 아름다운 죽음 웰다잉에 대한 인식이이제는 대중적으로 주목을 받으면서 저변화 되어가고 있다. 아름다운 마무리 웰다잉을 추구하고 준비하는 사람들은 현생의 삶도 하루하루 소중하게 가꾸며 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저작권자 © 충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