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박은경 충청북도 양성평등가족정책관 주무관

얼마 전 저녁 식사를 하던 중 딸이 반찬투정을 하며 할머니가 해주신 김치 부침개와 계란찜이 먹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에 엄마도 가끔 할머니가 해주셨던 음식이 아직도 생각난다며 할머니의 음식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따스한 음식이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문득 우리 시대에 할머니가 아닌 할아버지가 해주신 음식이 그리워지는 사람이, 아니 그보다 할아버지가 해주신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부엌이라는 공간은 여성의 전유물이었고, 가정에서 음식을 만들고 자녀들을 돌보는 것은 여성의 역할로 규정되어 있었다. 남성들은 가족을 부양하고 생계를 유지하는 가장으로서 주로 직장에서의 역할에 중점을 두어 가정에서의 역할은 제한적이었다.

지금이야 '요섹남'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며, 남성들이 능숙하게 요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지만, 예전에는 남성이 부엌에서 요리하는 것은 이례적이고 남자답지 못한 행동으로 여겨졌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가족 구조와 가치관도 변화하였다. 여성들의 사회 참여가 증가하면서 남성과 여성의 가정 내 역할 분담은 성(性)에 따라 정해진 것이 아니라 상호 협력하여 공평하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인식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현실은 이러한 인식개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2021년 여성가족부 양성평등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자녀 돌봄은 여성 몫'이라는 성역할 고정관념은 크게 완화했지만 현실에선 여전히 가사·돌봄 책임이 여성에게 집중돼 있다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가사시간에서 여성이 남성보다 2.5배 더 많은 노동시간을 할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실질적인 가정에서의 양성평등을 위해서는 인식개선을 넘어 실천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다양한 제도와 프로그램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최근 이런 시대적인 요구에 맞춰 충북여성재단에서 '할아버지 부엌'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충청북도 내 60세 이상 남성을 대상으로 김치·수육 만들기 등 식사 요리법과 영양 상식 교육을 무료로 진행하여 남성 노인의 자기돌봄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되었다.

게다가 단순한 요리법 강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평등 인식개선 교육을 함께 진행하여 가부장적인 시대를 살아왔던 어르신들의 성별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데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가 되는 사업이다.

'할아버지 부엌'은 지난해 충주, 옥천, 괴산에서 운영하여 큰 호응을 얻어 올해는 청주,  보은, 음성, 단양 등 4개 시·군에서 확대 운영하고 있다. 이러한 프로그램을 통해 남성들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확장해 나가고, 성평등한 의식을 키워 나가는 좋은 기회가 마련되고 있다.

가사 분담의 공정성은 가정 내에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양성평등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부분이다. 부엌에서의 작은 변화가 우리 사회의 큰 변화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 변화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에 일조하기를 희망한다.

앞으로는 할아버지가 부엌에서 요리하는 모습이 자주 보이고 그 음식이 맛있다고 손주들이 말하는 시대가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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