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사색] 정우천 입시학원장

같은 상황이라도 누구와 같이 겪느냐에 따라 지옥처럼 느끼기도 하고 천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전쟁의 처참한 상황에서도 불멸의 사랑으로 행복의 절정을 경험하는가 하면 안락한 상황이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기도 하다. 그러니 좋은 사람과 함께 즐기는 일은 최상의 행복이다. 돌도 안된 손녀 포함 딸애 가족이랑 떠나는 이번 여행은 그래서 여러모로 특별하다.

팬데믹으로 멀리했던 공항을 3년 만에 다시 찾았다. 무릎관절이 허락하고 심폐기능이 협조하는 황금 같은 몇 년을 속절없이 낭비하고 말았다는 아까운 생각이 든다. 나이가 들어가니 멀리 방문하는 어떤 곳이든 이번이 생에 마지막 방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다시 못을 장소라는 생각은 지금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여행이라는 현재성에 집중하게 한다. 지금 내 삶의 중심은 이곳이라는 자각이 뚜렷하다. 시간의 지체는 이자를 낳는다. 바이러스로 미뤄두었던 몇 년이라는 시간은 더욱 커진 기대감이란 이자를 붙여 다가온다.

해 질 녘 비행으로 창밖에는 특별한 풍경이 펼쳐진다. 창 너머 서쪽 하늘은 지는 해로 노을이 구름 위에 붉게 물든다. 겨우 땅 위에서 10km 남짓 하늘로 떠 있을 뿐인데 부대끼는 삶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져 있는 느낌이다. 지구를 계란으로 보면 지구를 뒤덮고 있는 대기는 겨우 계란껍질 정도에 불과하고, 인간을 티끌처럼 보이게 하는 망망대해인 바다도 지구를 사과 크기로 줄이면 씻고 난 사과에 묻어있는 물기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어찌 생각하면 보잘것없는 하찮은 것에 매달려 삶을 낭비하고 시달리면서 사는 게 인간 같다.

짧은 비행에 신속한 통관을 마치고 공항에서 한 정거장 거리에 있는 린코타운 역에 내려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아직 저녁 7시도 지나지 않았는데 오사카 남단의 신개발지는 거대한 건물군들 사이로 황량한 어둠이 내리 앉는다. 폐점 전의 대형마트에 들러 할인 초밥으로 한 끼를 준비하며 저렴한 일본의 물가에 놀란다. 썰렁한 거리는 거품경제의 끝머리에 서 있는 왜소해진 제국의 저물어가는 모습처럼 쓸쓸하다. 오사카만의 바람이 세차게 불어대는 거리를 분주히 걸어가는 현지인들의 모습과 검소함을 넘어서 점점 저렴해지는 일본의 모습이 옹색해 보인다.

반대로 놓인 운전대의 방향에 혼란스러워하며 남쪽으로 달려 혼슈의 남쪽 바다에 접한 와카야마현의 ‘시라하마’라는 작은 마을로 향한다. 어쩌다 보니 한국인 관광객 실종 사건으로 방송됐던 와카야마현이 여행지가 돼버렸다. 전통 료칸 분위기인 온천지 숙소에 짐을 풀고 이름 대로 흰 모래 해변(白浜)으로 유명한 일본 남해안의 몇 군데 관광지를 둘러본다.

자살바위로 유명한 바닷가 기암절벽인 산단 베끼(三段壁)에는 투신자를 위한 위령비와 이루지 못할 사랑의 글을 립스틱으로 써놓았다는 바위가 있다. 누군가의 슬픔과 비련, 죽음도 타인에게는 관광상품이 될 수도 있는 게 인간의 잔혹함이기도 하고 삶의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섬나라이다 보니 특별할 만한 오션뷰가 지천으로 널려있다. 그래도 해식동굴 때문에 기이한 모양이 된 섬 엔게츠도로 넘어가는 석양의 저녁해는 쉽게 잊히지 않을만한 멋진 풍경이다. 손녀가 자라서 석양을 배경으로 남긴 사진의 의미를 알게 될 때쯤 나는 어떤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낯선 경험은 뇌를 각성시키고 그 각성은 시간을 느리게 흐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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