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황홀했던 화려한 가을이 지나가면서 흘려 놓은 흔적들이 길바닥에 이리저리 나뒹구는 계절이다. 노란 한 잎조차 남아 있지 않은 앙상한 은행나무가 가로수 길에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엊그제 비가 내리고 찬바람이 불어오더니 나뭇가지에 불안하게 매달려 있던 잎사귀가 바닥에 떨어져 누워있다. 산책로를 걸어가는 발걸음이 미끄러지는 느낌으로 조금은 불편하다. 초록빛 잎으로 붉은색 단풍으로 눈을 호강시켜주던 나뭇잎이 낙엽이 되어 남은 자들의 몫으로 남는다. 산과 강에 소리 없이 겨울이 다가오는 사이에 가을은 저 멀리 숨어버린다.

최근 우리나라의 저출산 위기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칼럼에서 한국의 합계출산율이 0.7명인 세계 최저수준으로 한국이 지구상에서 소멸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였다.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 몰고 온 인구 감소를 능가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될 수 있다는 전망마저도 나오고 있다. 앞으로 수십 년 동안 출산율이 낮은 수준으로 지속될 것이라고는 믿고 싶지 않지만 걱정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몇 년 안에 출산율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인구 감소가 미칠 영향은 생산력과 성장률 저하, 병역 문제, 의료비 및 국민연금 부담 등 복잡하고 다양하다. 현재 사업을 하고 있거나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얼마 전 세계적인 유명 발레리나가 TV에 출연하여 고민을 털어놓고 상담하는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35년 이상 긴장의 연속에서 포장하며 살았다면서,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고민이나 속마음을 털어놓은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제 나이가 들어 언젠가는 무대를 떠나야 하는데 은퇴를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이다. 소중한 자식 같은 발레를 떠나보낼 때 공허함을 견디지 못할 것 같다고 고백하였다. 상승정지증후군(meta-pause syndrome)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던 사람들이 더 이상 올라갈 곳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허무함과 공허함을 느끼는 현상이다. 어릴 때부터 발레 하나만 생각하고 달려왔으니 무대를 떠난다는 상상조차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무용수에게는 두 번의 죽음이 있다고 한다. 무대를 떠나갈 때와 인생에서 모두 맞이하는 죽음이다. 무대를 떠난다는 것은 엄청나게 큰일이다. 언젠가 너무 훌륭하고 아름다운 세계적 발레리나였던 후배가 전화를 걸어 아기를 낳고 싶다며 춤을 그만두겠다고 하였다. 발레리나에게 결혼과 출산은 큰 숙제로서 인생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과정이라며 통곡하며 함께 울었다. 그 후배가 무대를 떠날 때 여자로서 자신의 삶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은퇴할 나이가 되어 지나간 세월을 회상하며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서 인간적인 슬픔이 느껴졌다. 정말 사랑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말 사랑하던 것을 버려야한다는 사실이 정말 아이러니하다.

삶은 무한하지 않고 발휘할 수 있는 에너지 또한 한정되어 있다. 그래서 곡 필요한 곳에 좋은 에너지를 사용하여 삶을 가치 있게 꾸려갈 필요가 있다. 세상의 많은 일들 중에서 정말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우선순위에 놓는 것이 바람직하다. 원하는 일만 하기에도 삶은 너무 짧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한다거나 실망을 주지 않기 위해 원치 않는 일을 참고 견디면서 낭비하는 시간과 에너지가 너무나도 소중하다. 방에 쓸데없는 물건이 많으면 필요한 것을 찾아내기가 어렵듯이 주변을 둘러싼 일이 너무 많으면 정작 중요한 것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삶의 지혜는 중요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단순화하는 데 있다는 말이 떠오른다.​​

작년 가을부터 새로운 사업을 준비하던 후배가 입주 예정인 신축 건물이 준공허가를 받지 못해 계획에 차질이 발생하여 어려움에 빠졌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문제로 일이 꼬이면서 처음에는 많이 힘들어 했다. 백방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결국 포기하고 다른 건물을 찾아 다시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마땅한 해결책이나 도움을 줄 수 없는 형편에서 마냥 위로와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것이 오히려 불편을 주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며 지켜보았다. 며칠간 고민하고 나서 웃는 얼굴로 찾아와 감사하게 모처럼 시간이 주어졌다면서 두서너 달 지친 몸과 마음을 가다듬어야겠다는 생각을 듣고 반대로 위로를 받았다.

역사적으로 아무도 가지 않는 길이나 위험하다고 모두 회피하는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이 위대한 성취를 이루었다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역설적으로 남들이 걱정스럽게 바라보거나 실패의 가능성이 높은 길이 오히려 성공에 가까운 길이다. 넬슨 만델라는 인생의 가장 큰 영광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고 하였다.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나아가면 주변의 배경이나 지원, 자본이라는 조건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은 마음 자세이다. 시간이 반이나 남아 있다는 것과 반밖에 남지 않았다고 보는 관점은 차이가 크다. 시간이 반이나 남아 있으니 앞으로 노력하면 나머지 반도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이 조그만 역경에도 비관적으로 절망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구름의 뒤편은 반짝인다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든 상황에도 희망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당장의 불행이 반드시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원하는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고 해서 마냥 좋다고 할 수도 없다. 새옹지마(塞翁之馬)와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가장 어두운 밤일지라도 언젠가는 그 끝이 오고 반드시 해는 떠오른다는 말처럼 지금 앞을 가로막는 수많은 난제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눈 녹듯 한순간에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 지금까지 쉬지 않고 정신없이 달려온 삶이 갑자기 멈추었을 때 비로소 깨닫는다. 진정 마음이 흐르는 길이 바로 삶의 정답이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산처럼 물처럼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가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상상하는 초겨울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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