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어느 해보다 해 넘김이 스산하다. 들려오는 소식마다 불길하고 얼마나 더 나빠져야 끝이 보일지 앞날이 막연하다.

몇 해 전 무료로 독감 주사 혜택을 본 적이 있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기승을 부릴 때였고 날마다 언론에서 겁을 줄 때였다. 독감과 코로나 예방주사를 맞고 누가 누가 죽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마음 편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필자도 접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날마다 고민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죽하면 매년 으레 무료접종을 하던 사람조차도 꺼려 내게까지 차례가 돌아왔을까.

백신을 맞고 사망했거나 부작용을 겪은 사람은 예전부터 존재했다. 다만 언론이 보도하지 않았을 뿐이다. 간혹 백신을 이기지 못하는 예도 있다. 하지만 많은 사람에게 훨씬 도움이 되기 때문에 백신이 존재한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을 느끼면서도 무작정 견디던 지난날은 돌아봐도 끔찍하다. 언론은 사실 보도도 중요하겠지만 공정하게 보도했어야 한다. 한 가지 사실만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국민에게 겁을 준다면 제대로 된 언론이 아니다.

감염병은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원인과 치료법을 모르던 시대에는 역병이 돌면 병든 사람을 내쫓았다. 13세기에 유럽에서 한센병이 유행하자 마을에서 쫓아냈고 14세기 페스트가 유행할 때도 서로 어울리지 않으며 스스로 격리를 자청했다. 16세기 초 매독이 유행하자 역시 사람을 쫓아버려 병을 피하려 했다.

보건복지부는 지난해 8월 대한민국의 기술력으로 ‘국산 1호 코로나19 백신’이 탄생했다고 했다. 미국, 영국에 이어 우리나라가 세 번째로 코로나19 치료제와 백신을 모두 보유한 국가가 됐다는 것이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 모두가 한뜻으로 이뤄낸 값진 성과라며 이 귀중한 과정과 결과는 국민 모두에게 다음 위기를 대처할 수 있는 큰 힘이자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했지만 코웃음만 나왔다. 전 정부 시절 그토록 미친 듯이 백신과 죽음을 연관 짓는 기사를 남발하더니 정부가 바뀌었다고 이렇게 천연덕스럽게 말을 바꿔도 되는가 싶어서다.

바이러스의 위협에 공포를 느끼면서도 무작정 견디던 지난날은 생각할수록 끔찍하다. 하지만 지금이 더욱더 끔찍하다. 한숨 돌렸나 했더니 일본의 핵 오염수 해양 방류로 인한 방사성 물질 피폭과 기후 위기, 전쟁과 바이러스, 경기침체, 잔혹 범죄 등 일상을 뒤흔드는 사건은 이 순간에도 우리네 목줄을 조여 온다. 아직 견딜만하다면 운 좋게 불행이 비껴간 것이고 언제 어느 때 내 일이 될지 마음 놓을 수가 없으니 날마다 살얼음판이다.

거리에 찬 바람이 분다. 동지를 앞두고 있어 오후 5시만 되어도 어두컴컴하다. 재래시장 안에 있는 맛집들이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아직도 인간 사회에 각종 바이러스가 존재하는데 사람들 대부분은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소에 마스크를 쓴 사람이 그다지 보이지 않고 특히 식당이나 카페마다 서로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먹으면서도 거부감이 없어 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폭탄을 맞았던 식당에 다시 손님이 몰아닥치는 현상은 축하할 일이다. 그러나 다른 상가는 전혀 그렇지 못해 경기침체의 바닥을 보여준다.

산 너머로 석양이 사라지듯 마지막 달도 훌쩍 지나가 버릴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오늘보다 더 좋아질까. 얼마나 강력한 백신을 맞아야 마음 놓고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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