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산책] 김법혜 스님 철학박사.민족통일불교중앙협의회 의장

사람은 누구나 새것을 좋아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가슴이 두근거리기도 한다. 물건을 살 때도 새 상품에 일단 눈이 끌린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신당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정당사다. 정당이 새로이 탄생할 때면 당명으로 ‘신’(新) 자나 ‘새’ 자가 붙은 것이 상례였다.

우리나라 정당사에는 ‘신’ 자나 ‘새’ 자가 들어가는 정당이 많았다. 옛날에는 한자어인 ‘신’ 자를 많이 사용했지만, 갈수록 순우리말인 ‘새’ 자를 많이 사용했다. 앞으로 정계개편이나 신당 창당을 하면 또다시 ‘신’ 자나 ‘새’ 자를 당명을 사용하는 정당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내년 4월 10일 22대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정치권은 이곳저곳에서 신당설(?)이 난무하고 있다. 사람들이 부르는 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 ‘이준석 신당’, ‘조국 신당’, ‘이낙연 신당’, ‘양향자 신당’, ‘금태섭 신당’ 등이 있다. 과연 어느 신당이 창당할 수 있을까?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는 ‘성공한 신당’에 대한 개념을 조금 좁힐 필요가 있다. 기존의 여당과 야당이 아닌 제3의 새로운 정당을 창당한 뒤 총선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하면 ‘성공한 신당’일 것이다. 성공한 신당에는 언제나 대선주자급 정치인이 끼어 있었다.

왜 그럴까? 우리나라 유권자들은 정당보다는 사람을 보는 경향이 짙기 때문이다. 독재의 후유증과 승자독식 대통령제 권력 구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창당 중이거나 창당을 시도하고 있는 신당 가운데 성공 가능성이 큰 신당은 대선주자급 정치인의 관여 여부가 무엇보다 관건이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신당은 없다.

총선을 4개월 앞둔 현재 정가의 관심은 신당 창당설이 난무하고 있다. 정치인의 금태섭, 양향자 신당부터 이낙연, 조국, 유승민 신당도 꿈틀거린다. 신당이 진보와 보수의 분열을 의미하는 이유도 제각각이다. 마치 부동산 시장 과열 때 반짝하는 떴다방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철새 정치인의 신당 바람이 되기도 한다. 개중에는 신당을 창당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터무니없는 소설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정치 시장이 그만큼 불안정하다는 의미이고 국민으로부터 그만큼 불신을 받고 있다는 방증이다.

신당 움직임의 배경은 이런 정치권 주자들이 제3세력을 앞세우고 무리한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버림받은 철새 정치인은 정치가 실종됐고 대결 정치에 따른 정치 후퇴와 민생파탄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선택을 앞둔 국민이 이 같은 당에 표를 줘 정당을 만들어주면 극단적 대결정치가 되풀이될 게 자명하다. 잘하는 것 하나 없이, 오직 상대방을 공격하기만 하면 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에게 양당 중 택일하라고 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국민이 신당 움직임 등 제3세력에 주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양당체제에 신물이 난 유권자에게 다른 선택지를 주는 의미도 있다. 제3세력이 캐스팅보트를 쥐면 최악의 대결 정치는 피할 수 있다. 또 대화와 타협의 정치도 복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3당 체제가 안는 한계도 분명히 있다.

그래서 새로운 실험이자 모험이다. 신당 창당의 목소리가 있는 것을 고려하면 향후 신당 창당 붐이 일어날 가능성이 제기된다.

단, 우후죽순식의 신당이 나오면 자칫 여러 신당이 경쟁하는 구도를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 실패한 양당제에 다시 힘을 실을지, 제3의 길을 가볼지 선택은 결국 국민 몫이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쯤 정치 양극화의 덫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어쩌면 소선거구제를 버리고 중선거구제를 채택하는 것이 국민에게는 지금보다 훨씬 다양한 답안지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분노와 증오를 부추겨 먹고사는 거대 양당의 과점 체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기억하라. 분노와 증오를 불러일으키는 그들도 역시 분노와 증오로 밥 먹고 산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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