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곽상현 선경세무법인 대표‧세무사

기업들은 연말이 되면 1년 동안 장사를 잘 해 왔는지, 손실이 있지는 않은지 결산을 통해 한해를 마무리 하곤 한다. 이익이 날 때도 있지만 손실이 날 때도 있다. 손실이 나면 수익을 내기 위해 고민하고 비용을 줄이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기업처럼 이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1년간 예산과 실제 지출사이에 차이가 있었는지 국가의 재정건정성을 계속 확인하여 부실하지 않도록 관리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재정준칙’이다.

정부가 2020년 10월 5일 발표한 ‘한국형 재정준칙’은 2025년부터 국가채무 비율을 국내총생산(GDP) 대비 60% 이내, 연간 통합재정수지(정부 총수입 대비 총지출)는 적자 3% 이내로 관리하겠다는 내용이 주 골자이다. 국가채무가 급격히 늘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준칙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던 게 배경이다. 늦었지만 정부가 이제라도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나랏빚의 위험성을 직시하고 건전 재정관리에 나선 것은 다행이다.

2016년에도 정부가 전문가 의견을 수렴해 국가부채 비율을 GDP의 45% 이내, 연간 재정 적자를 3% 이내로 제한하는 ‘재정건전화법’을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었다. 하지만 코로나와 세계경제 둔화, 전쟁의 영향 등으로 국가채무는 계속 증가하였고 현재 우리나라의 채무는 약 1200조원에 달한다. 이는 GDP의 51%에 달하는 수치이다. 정부 지출은 확대되는데 기업 여건 악화로 법인세를 비롯한 주요 세수입 확보는 어려워지고 있다. 나라 빚을 관리하는데 녹록지 않은 여건이라는 얘기다.

다른 국가에 비해 국가채무 비율의 절대수치가 높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 증가 속도는 매우 놀랍다. 채무 증가에 일단 속도가 붙으면 원리금 상환 부담이 배가되면서 관리가 어렵기 마련이다.

IMF에 따르면 2017년 정부부채 비율이 40.1%에서 2022년에 53.5%로 2028년(추정치)에는 57.9%로 싱가포르에 이어 2위로 올라설 예정이다. 이전의 다른 국가들이 재정위기국으로써 경험한 속도에 필적할 정도다. 실제로 최근 유럽 재정위기를 경험한 국가를 보면 순식간에 정부 부채 비율이 상승한 것이 사실이다. 그리스는 2008년 100%대였던 국가채무 비율이 불과 3년 후인 2011년에는 180%까지 높아졌다. 스페인은 2008년 40%대에서 6년 후인 2012년에 2배인 80%대에 도달했고, 아일랜드도 2008년 40%에서 불과 2년 후 80%대에 이르렀다. 위험은 훨씬 빠른 속도로 예측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우려에도 불구하고 준칙내용이 지나치게 느슨한 것은 문제다. 과연 제대로 된 준칙 구실을 할지조차 의심스럽다. 기획재정부는 목표 지표를 유럽연합(EU) 권고기준에 맞춰 ‘국가채무 60%, 재정수지 적자 3%’의 두 기준을 적용하기로 했지만, 대부분의 국가와 달리 기준의 ‘동시 충족’이 아니라 ‘종합 고려’로 기준을 낮췄다. 둘 중 하나가 기준치를 초과하더라도 다른 지표가 기준치를 밑돌면 준칙을 충족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실효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예외 허용 상황도 논란이다. 전쟁, 대형재해, 경제위기 등이 발생하는 경우 이 한도를 적용받지 않는다고 한다. 경기가 둔화할 때는 재정적자 기준을 -3%에서 -4%로 완화하는 데다, 예외 기준 마저 ‘전문가 협의 등을 거쳐 마련 한다’고 막연하게 규정해 정부가 쉽게 준칙을 무력화할 수 있도록 했다. 구체적 산식 등 세부 수치를 본법이 아닌 시행령으로 정하도록 한 것도 문제다. 정부가 마음먹기에 따라 기준을 쉽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국회 기획재정위원회의 ‘국가재정법 개정 검토 보고’자료에 따르면 전 세계 159개국은 이미 재정준칙을 갖고 있다. 이 중 법률에 근거를 둔 국가는 103개국, 아예 헌법에 명시한 국가도 14개국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중 재정 준칙이 없는 나라가 한국과 터어키 둘 뿐이니 ‘우리도 만들었다’는 선언적 의미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유례를 찾기 힘들 만큼 빠른 노령화 및 저출산, 잠재성장률 추락, 돌발적인 통일비용 등의 부담을 지고 있다. 선진국에선 보기 힘들 정도로 비대한 공기업 부실도 결국 정부 부담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2050년대 후반에는 공무원연금기금에 이어 국민연금기금 등도 고갈 위험에 처해 재정부담은 더욱 가중될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도 정부는 재정건전성이 OECD 회원국 가운데 최상위권이라면서 급증하는 나랏빚에 제동을 거는 것에 너무 안이하다.

정치권의 요구에 휘둘려서 정부가 곳간을 풀어버린다면 제동을 걸 수단은 흔치 않을 것이다. 재정준칙을 두는 이유는 이런 포퓰리즘의 유혹을 떨쳐내고 책임 있고 지속가능한 국가를 만들자는 것이다. 훨씬 더 촘촘한 그물망의 준칙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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