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시평] 김희한 시인·수필가

숲이다. 벽에 걸어놓고 겨우내 보았던 숲이다. 지난 가을 뒷산에 올랐다가 잎이 싱그러운 나뭇가지 두 개를 주웠다. 태풍에 휘둘렸나 보다. 그늘에 말려야 푸른색을 유지할 수 있다. 얼른 집에 와서 갈색 가죽 끈으로 묶어 벽에 매달았다. 볼 때마다 숲이 가슴에 안겼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쏴쏴 파도 소리를 몰아왔고, 소나기라도 힘차게 내리면 자동차 경적도 아이들 울음도 다 감싸고, 오직 그들만의 신나는 초록색 파티 속으로 나를 데려갔다.

벽에 걸렸던 가지를 조심스레 하얀 자작나무 책상 위에 놓았다. 바삭바삭! 소리가 좋다. 건드릴 때마다 마른 소리를 내지만, 짙은 녹색 잎은 여름의 열정과 가을의 숙고와 겨울의 침묵이 있었다. 버리기 아깝지만 버려야 한다. 새로운 것을 들이기 위해서는 비워야 한다. 비워야 한다는 것에 생각에 미치자 이미 버린 것들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등진 후 집을 팔기로 했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밀려오는 무거운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다. 돌 침대, 하나하나 먼지를 닦아주며 키우던 화초들, 예쁜 꽃이 그려진 그릇도 누구건 필요한 이에게 주었다. 그리고 임자가 없는 것은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문우가 집에 들렀다. 그녀는 암이 재발하여 어려움을 겪는 중이었다. 옷을 정리하는 나를 보고 자기가 입겠다고 했다. 사놓고 안 입은 빨간색 정장은 자기가 좋아하는 디자인이라며 얼른 안던 그녀였다. 모자도 쓰겠느냐는 내 말에 그녀는 팔짝 뛰면서 좋아했다. 점점 성글어지는 머리에 새로운 왕관이라도 얹는 것처럼 모자를 쓰고 환하게 웃었다. 

살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아는 그녀는 굳이 병원에 있으려 하지 않았다. 그 대신 문우들과 식사 자리를 자꾸 마련하였다. 자신은 몇 수저 뜨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대접했다. 그녀와 쌈밥도 먹고 칼국수도 먹었다. 누구는 밭을 두어 고랑 그녀에게 주었다. 그녀의 집에서 30여분 걸어서 갈 거리였다. 고구마도 심고 옥수수도 몇 포기 함께 심어서 함께 가꿨다. 자신이 가꾸는 식물이 자라는 것을 처음 보는 그녀는 고구마 이야기만 나오면 얼굴이 상기되었다.

그녀를 다시 만난 곳은 산속에 있는 요양원이었다. 조용해서 좋고, 공기 좋아 좋고, 간호하는 분들이 친절해서 좋다고 했다. 마음에 천국이 있으니 어디 있어도 그녀는 평안을 느끼는가 보다. 깻잎장아찌가 먹고 싶단다. 얼른 다음에 올 때 가져 오마 약속했다. 더 가늘어진 그녀의 손을 잡고 온 것이 마지막이 되었다. 좋아지나 싶던 그녀가 갑자기 하늘로 갔다는 소식이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떠난 빈자리에 무엇이 들까? 바람 한 줄기, 마른 검불 몇 개, 혹은 새로 돋는 풀, 씨가 날아와 자라난 커다란 나무. 그리고 된장찌개, 볼을 쓰다듬던 손, 같이 공을 치며 바라보던 하늘, 가지치기한 매화나무,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리고 뭉게구름 가득하고 바람이 구름 위로 휘휘 부는 날이면 그렁그렁해지는 눈동자, 신날 것도 없고 땀 날 것도 없는 날들이 그냥저냥 가는 것이라고 중얼거리는 잠깐의 시간이 들어설까?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봄은 오고 천지는 푸르고 꽃은 피었다.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엄청난 것을 잃고도 소리 없이 시간은 간다. 아니다. 악! 악! 지르며 내는 소리를 사람들이 못 듣고 자연이 못 듣고 갈 뿐이다. 머리 위에 자랑스럽게 또 폼 나게 쓰던 모자가, 의미를 잃어 벗어 놓은 것을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 숲에 떨어진 참나무가지 하나 주워들고, 봄의 설렘과 여름의 열정과 가을의 성숙을 음미할 수 있으면 그만이다. 걷는 즐거움을 막 배운 손녀와, 잎을 틔우느라 한창인 감나무를 자주 안아 볼 일이다. 제 남편과 다툰 후 기죽은 며느리에게 “너와 함께 살아보니 더 안심된다. 너를 자세히 알게 되어 기쁘다.”는 말을 해줄 일이다.

창밖으로 눈을 돌리니 나뭇가지를 다 가릴 정도로 꽃이 흐드러졌다. 붉은 화관을 쓴 가을 벚나무가 꼭 그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람이 살살 나뭇잎을 흔들면 그녀의 웃음소리가 호호호 높은 소리로 들릴 듯하다. 내가 준 모자를 몇 번이나 썼을까? 큰언니가 달라는 것을, 내가 더 쓴 다음에 주겠다고 했다던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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