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황종환 중국 칭화대학 SCE 한국캠퍼스 교수ㆍ한국자산관리방송 논설실장

새해 아침이 밝았다. 세월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듯하다. 매번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한 가지 정도는 새로운 일을 찾아 해야겠다는 의례적인 다짐을 한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계획하고 이루고 싶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지금까지 게으른 탓에 해야 할 일을 미루고 작은 약속이라고 소홀했던 일들을 반성하며, 스스로 마음의 문을 닫아걸었던 잘못을 뉘우치고 겸손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오늘 밖에 없는 것처럼 시간을 소중하게 여기면서 사랑하는 마음으로 배려와 겸손의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고 듣고 말할 것이 너무 많아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항상 깨어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지만 눈은 순결하고 마음은 맑게 지니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하얀 눈을 듬뿍 뒤집어 쓴 산책길 나무들이 추위에 몸을 부르르 떨고 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달랑 매달린 잎사귀가 불어오는 바람 속에 춤을 춘다. 머지않아 꽃을 피우리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애타는 몸짓이다. 소복소복 쌓인 눈밭에 손대면 사르르 녹아내릴 것처럼 싱그럽고 부드럽다. 부스럭 부스럭 발에 드리워지는 겨울의 소리를 듣는 순간 마음이 편안해진다. 봄날의 햇살처럼 반짝 다가와서 꽁꽁 얼어붙은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주는 따스함이 생명의 고동소리를 느끼게 한다. 가장 따뜻한 계절은 겨울이 아닐까 싶다. 겨울이 조금은 따뜻했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애타는 사랑도 이처럼 소리 없는 몸짓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양재천변 공원에서 어느 노부부가 손을 꼭 잡고 산책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가끔 대화하는 듯 보이지만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 지을 뿐 말이 없다. 한참 걷다가 길가의 나무의자에 앉았다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다시 오던 길을 간다. 요즘 나이 든 부부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모습이 그다지 자주 보이지 않는 세상이다. 하루는 지나치는 길에 인사를 하며 원래 두 분은 말씀이 없으시냐고 여쭤 보았다. 노부부는 그냥 웃음을 띠며 아무 말을 하지 않다가 한참 후에 젊었을 때는 사랑의 표현 등 여러 말을 많이 했었지만, 말이 많으면 싸우게 된다는 것을 세월이 지나 나이가 들어가면서 알게 되었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랑은 말로 하는 게 아니고 가슴으로 표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일상적인 대화에서조차 상대방과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갈등을 극복하기는 여간 쉬운 일은 아니다. 상호간에 정서와 감정이 직접적으로 교류하는 사회관계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상대의 말이 논리적으로 옳고 타당하다고 할지라도 감정이나 정서가 맞지 않으면 싫은 것은 싫을 수밖에 없다. 얼마 전 장관직을 그만두고 정치권에 들어선 어느 분이 삼백 명이 쓰는 여의도 화법이나 문법이 아닌 오천만 명이 사용하는 문법을 쓰겠다면서 정치인들의 언어 습관을 비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과연 바람직한 언어는 무엇일까. 자신의 방식을 고집하지 않고 세상의 상식과 기준에 맞는 사랑과 배려의 언어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다.

사람들과의 관계는 말로 시작해서, 말로 꼬이고, 말로 풀어진다고 한다. 비폭력대화의 저자 마셜 로젠버그는 “당신이 하는 다음 말이 당신의 세상을 바꾼다.”라는 격언을 예민하게 깊이 의식했다. 언어가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에 관심을 갖는다. 아룬 간디는 이 책 머리말에서 “우리 자신이 변하면 우리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우리 자신을 바꾸는 것은 우리가 매일 쓰는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매일 쓰는 언어와 대화 방식을 바꾸는 데서 시작하여 자신이 변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존경하며 가까이 교류하는 법원장을 지내신 선배가 '가슴의 언어'라는 제목의 네 번째 시집을 출간하였다. 한권의 책도 내기는 쉽지 않은데 다수의 에세이집과 역사 연구서 등을 출간하였으니 그 열정의 끝이 어디까지인지 궁금하고 놀라울 뿐이다. 시인은 가슴은 하늘이 노래지는 아픔으로 낳은 핏덩어리 자식에게 내어주는 곳이고, 자식이 어둠 속으로 먼 길을 걷는 하루하루를 졸이고 끓이고 태우면서도 언제나 한곳을 지키고 떠나지 않는 아득한 품속의 별자리라고 노래한다. 세상의 모든 가슴들 속에서 차가운 밤하늘에 깜빡이는 뭇별처럼 저마다 말 못하는 몸짓만 남고, 그나마 살아있는 징표인 언어는 자식의 이름자뿐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애타는 마음으로 자식을 껴안고 살아가는 어머니의 사랑을 가슴의 언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매섭게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는 길가의 나무가 더욱 쓸쓸하게 보인다. 그토록 풍요로웠던 들판은 텅 빈 가슴처럼 허허로운 겨울의 한복판이다. 그 곳의 따뜻한 기억들이 하얀 도화지에 한 폭의 고즈넉한 풍경화가 그려지는 상상을 한다. 가슴이 가슴을 꼭 안아주고 싶은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이다. 사랑의 가슴으로 보이고 들리는 천사의 노래가 온몸을 에워싸는 기분이다. 추운 겨울을 보내는 일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가슴만이라도 정말 따뜻하였으면 하는 마음이다. 소복소복 내리는 하얀 눈이 나무에 쌓여 눈꽃을 피우면 가슴에도 하얀 꽃이 활짝 피어나는 난다. 사랑의 꽃은 가슴에서 태어났기에 진정 가슴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언어가 필요한 시간이다.

세상이 소란할수록 내면의 고요함이 중요하다. 마음이 소란하면 외부 세상의 소음이 크게 들려 자연의 미세한 소리를 놓치게 된다. 내면의 소음이 잦아들 때 비로소 바위가 움직이는 소리와 나무에 물이 흐르는 고요하고 미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산이 높다고 반드시 명산이 아니듯 나이가 많다고 해서 반드시 어른이 아니다. 새해가 다가왔다고 세월의 무상함을 서글퍼하기보다 깨닫고 또 깨닫는 삶의 지혜가 차곡차곡 쌓여가니 나이가 한 살 더하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는 어느 시 구절이 떠오른다. 가려서 볼 줄 알고 새겨서 들을 줄 아는 세월이 일깨워 준 연륜의 지혜가 옳은 판단을 할 수 있게 한다. 아주 커다란 꿈에 욕심을 내기보다는 작지만 알찬 희망을 품고 소박한 행복에도 감사의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하는 새해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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