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해가 거듭될수록 소란스럽지 않게 새해를 맞으려 한다. 새해맞이 일출 여행을 떠나 밤새도록 도로에서 시간을 허비하다가 결국 도로에서 일출을 맞이한 경험도 있기에 환상 따위는 당연히 없다. 그러나 올해는 울진 죽변항 근처에서 새날 아침을 맞았다. 비거나 진눈깨비일지 모를 것이 내렸고 해는 시커먼 구름에 가렸다. 떠나기 전부터 눈이 올 거라는 사실을 기상예보로 알았다. 확률이 60%라고 했으니, 양의 진위는 몰라도 해를 보지 못함은 기정사실이었다.

도착해보니 전날 미리 자리를 잡아 텐트를 친 사람들이 많았다. 지역마다 해맞이 행사가 열려 굳이 먼 길을 가지 않아도 해맞이를 할 수 있다는 점도 길에서 고단하지 않게 했다. 해가 뜨지 않을 것을 이미 알았고 사진 몇 장 찍고 돌아갈 일정임을 번연히 알았다. 그러나 알람 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잠까지 설치며 이른 새벽길을 나섰던 것은 예전처럼 새해 소원을 빈다거나 새삼스럽게 바람을 가져 보고자 해서가 아니었다.

다시 몇 날이 지나고 퇴근길에 영화를 보러 갔다. 코로나 시대가 시작된 이후 처음이라 영화관이 낯설었다. 하지만 1천2백만 명의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의 흥행 대열에 끼여 보고 싶었던 이유는 1979년 12월 12일 밤 벌어진 사태를 TV의 뉴스와 신문 기사로만 접하며 그 시대를 살은 사람으로서 조금 더 사실에 가깝게 접근해 보고 싶어서였다.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으로 최규하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고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박정희의 지원으로 군부 요직을 독점하고 있던 전두환과 하나회 회원들은 육군참모총장이며 계엄사령관인 정승화를 비롯한 정통군인들이 자신들을 배제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지금도 영화와 같은 현실이 우리의 삶을 포진했다. 해가 바뀐 다음 날, 서열 8위인 제1야당 대표가 암살 테러에서 겨우 살아났지만, 왜 그런 일을 벌어졌는지 사실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거나 사건 본질을 흐리는 일만 계속되고 있다.

인파가 가득한 곳에서 심지어 유튜버가 현장 방송을 하는 곳에서 칼에 찔리는 장면이 생생하게 기록에 남았다. 그런데도 자작극이라느니 나무젓가락, 종이칼이라느니 하는 악의적인 헛소문이 양성되었다. 심지어 열상과 자상도 구분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로 그렇게 기사를 몰아간 것은 아닐까 의심스럽다.

더 한심한 것은 의료기관이 다른 의료기관으로 긴급한 환자를 이송하기 위하여 요청하는 경우 응급의료헬기를 운항한다는 출동 기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혜라고 우겼다. 더해 향후 일정과 수술 후 간병 등의 편의를 위한 가족의 요청을 두고 지역의료 무시라느니 불신을 조장한다는 등으로 호도하는 언론의 행태가 더욱더 가관이다.

일절하고 상식적인 국민이라면 내 가족이 이와 같은 일을 당했을 때 본인과 가족의 의사를 존중하는 게 최선이다. 이를 두고 특혜시비를 거는 것은 가당치 않다. 또한 지역 의사회가 반발한다는 따위의 기사도 혀를 차게 한다.

새해 첫날 구름 뒤에 가려진 태양을 상상했다. 그리고 마음속에 빛을 품었다. 흐린 세상에 마음에 촛불 하나쯤 켜 두어야 어둠을 이길 수 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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