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아침에] 김영애 수필가

몇 해 전 두번째 수필집에 ‘친정엄마와 3박 4일’ 이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엄마를 모시고 제주도로 가족여행을 갔던 행복했던 기억들이 떠오르면서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시간이라고 생각하니 그 순간들이 더 소중하게 다가온다. 엄마는 그때 한껏 멋을 내시고 젊은 우리보다 더 앞장서서 송악산 둘레길을 걸으셨었다. 제주도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에 립스틱을 곱게 바른 엄마의 연분홍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곱고 기력이 좋으셨다. 나이 숫자만큼의 속도로 시간이 간다더니 엄마의 시간도 가속력이 붙었는지 멋쟁이 엄마에서 할머니로 급속하게 변해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엄마는 전화를 하신다. 밥은 먹었니? 뭐를 먹었니? 아픈데는 없니? 칠십을 바라보는 늙은 나는 엄마에게는 늘 어린 자식이었다. 그렇게 자식들의 안부를 같은 레파토리로 일일이 챙기시는 일이 여든여덟이신 엄마의 유일한 소일이셨다. 낮에는 경로당에서 화투 그림 짝을 맞추는 민화투를 치신다. 저녁마다 전화로 낮에 경로당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며 구구팔팔 강사 선생님이 오셔서 그림을 그리고 춤을 췄다는 자랑을 한다. 점심 식사도 여럿이 함께 드시니까 밥맛도 좋다고 하신다. 정기적으로 보건소 직원이 방문해서 혈압과 당 수치 등 건강도 체크를 해주니, 우리나라는 노인 복지가 잘 되어 있다고 생각 한다.

엄마는 늘 TV를 보시면서 세상을 읽으신다. 세상 돌아가는 일에 우리보다 눈과 귀가 밝으시다. 뉴스를 보시다가 불쑥 전화를 하셔서는 정치판의 한심함을 토로하시고 트럼프와 푸틴이 인상부터 하는 짓이 당신 맘에 영 들지 않는다고 불만이셨다. 트로트 경연 방송을 즐겨보시는데 신바람이 나셨다. 즐기시면서도 엄마가 음악을 평가하는 수준은 매의 눈으로 냉철하시고 이제는 가히 마스터 심사위원 수준이 되셨다. 특별히 좋아하는 젊은 남자 가수에게 팬심도 생겨서 그 가수의 청주공연 티켓을 어렵게 구해서 모시고 갔다.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소녀처럼 박수를 치면서 좋아하셨다. 언제까지나 함께 여행을 다니고 맛집을 찾아다니고 콘서트도 보면서 살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느 날 엄마의 시계가 고장이 나버렸다. 수리비가 아무리 비싼들 고칠수만 있으면 좋으련만 너무 오래 사용해서 수선이 불가능한 기계처럼 엄마 몸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 부분들이 기능을 상실해버렸다.

친정엄마와 9박 10일 유럽 여행을 꼭 가고 싶었는데, 경치가 아름다운 유럽이 아니라 정신 줄도 놓고 인지능력도 없는 엄마와 병원 간이침대에서 9박 10일을 보냈다. 신경주사 부작용으로 섬망 증세가 와서 똑똑하고 총명하던 엄마가 중증 치매 환자 같은 행동을 하셨다. 사람도 몰라보고 깊은 잠에만 빠지셨다. 어쩌다 잠에서 깨어나시면 ‘언니가 여길 어떻게 와서 나를 도와주냐고’ 나를 돌아가신 이모로 착각을 하고 헛소리를 하셨다. 엄마는 아마도 죽음보다 깊은 잠의 바다에 빠져서 먼저 가신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오신듯했다. 누구를 만나고 오셨기에 당신만의 아득한 과거 이야기를 혼잣말로 한다. 몸도 가누지 못하는 엄마에게 억지로라도 음식을 떠넣어 드린다. 목욕을 시키고 기저귀를 수시로 갈아서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 뉘여 드리면서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목울대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 내가 지금 엄마 입에 밥을 넣어주고 진자리 마른자리를 갈아 뉘듯이 내가 어렸을 적에 엄마도 나를 이렇게 키우신 것이었지! 나의 눈물이 곤히 잠든 엄마의 얼굴에 떨어졌다. 며칠 후 엄마가 나를 알아보실 무렵에 엄마의 얼굴에서 나를 보았다. 크고 곱던 눈도 점점 작아지고 흰머리도 늘어났으며 이마와 입가에 깊은 주름이 똑같다. 했던 말도 또 한다. 눈이 어두워져서 책을 볼 때는 돋보기를 써야 하고 뭐든 깜박하고 자주 잊어버린다. 얼마 후 엄마는 다행히도 지팡이에 의지하고 퇴원을 하셨다. 그 전의 멋쟁이 엄마는 아니시지만 그래도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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