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군데군데 거뭇한 속살을 드러냈다. 태양이 게슴츠레하게 눈을 떴지만 가녀린 가지는 파리하다. 거친 바람에 이끌리는 나목은 겨울의 한가운데에서 쓸쓸하다. 사람도 살다 보면 벌거벗겨진 나신 위로 황량한 바람이 지나가고 흰 눈이 내려 옷처럼 입혀진 채 한 계절을 보내야 할 때가 있다. 한해, 한해 살아내며 이런 고비를 수없이 넘긴다.

이제 곧 봄이 오려나 하고 기대해 보지만 제자리를 걷는 것처럼 답답하게 여겨진다. 혼자만 그러한가 싶을 때 어쩌면 그을린 내면이 내가 아닐까 싶었던 오래된 벗의 서러운 겨울나기를 전해 들었다. 건강도 좋지 않은 사람이 경제적인 짐까지 짊어지는 안타까운 현실이 고스란히 가슴에 얹는다. 도움이 되지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는 비루한 삶이 마뜩잖다.

어둑한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나 고단한 걸음을 걸어 온 우리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듯한 나목은 벗의 얼굴이 스치고 등걸이 된 또 다른 누군가,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어디쯤 봄은 오고 있을까. 발가락을 얼어붙은 대지에 욱여넣어 온기를 찾는다. 땅속 깊숙이 두더지처럼 파고 들어가 몸의 뿌리로 더듬거린다. 촉각을 곤두세우느라 서러운 세포의 눈물이 젖어 든 땅은 얼어붙어 돌덩이처럼 팍팍하다. 척박한 이 들에서 봄을 기다려도 되는 것일까.

사람살이란 처음부터 주어진 것도, 부모도 형제마저 다르다. 처해진 상황은 천차만별이지만 그 속에서 희로애락을 느끼는 것이야 누구의 삶엔들 없으랴.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아버지를 열다섯에 여읜 나의 삶은 조급증에 걸린 사람처럼 앞만 보고 내달려야 했다. 당신 살아생전에 나이 찬 딸들을 짝 지워 보내신 덕분에 어머니와 겨우 열 살짜리 남동생과 덩그러니 남겨졌다. 어머니는 늦둥이인 자식들을 최선을 다해서 키우셨을 테고 동생도 허울 좋은 장남이라는 이름으로 버텨냈을 것이다. 나 또한 항상 소녀 가장이라는 짐이 어깨에 매어져 있었다. 아버지의 유지(遺旨)를 받들어야 했기에.

그때의 어머니 나이가 되었다. 반백 년을 넘겨 이제 이순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만 일터에서 벗어나 달가운 자리만 찾고 싶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다. 지난해에 일어났던 자연재해가 일터를 덮치는 바람에 조금 더 치열하게 살아내야 한다. 푸념하다 보니 병상에 계신 어머니가 걱정이다. 그리고 이맘때의 절박했던 시간이 떠오른다. 하루아침에 지아비를 잃고 이듬해 의지하던 시어머니마저 떠나신 어머니의 황망함, 슬퍼할 사이도 없이 어린 자식들을 키워야 했던 어머니의 삶. 그저 먹이고 입히는 일이 우선이었고 지아비가 남긴 손바닥만한 땅을 지켜 내야만 했다.

겨울 속에 갇힌 나의 삶을 보시며 어머니는 ‘이 정도 추위쯤이야.’ 하실 터이다. 설산이 된 뒷산에 허리를 낮추고 올라 부러진 잔가지를 주워다 아궁이에 불을 지펴 소여물도 쑤고 가마솥에 밥도 지으시리라. 불기 남은 아궁이에 고구마랑 밤의 머리에 숨구멍을 내어 다독여 두면 ‘타악탁’하고 밤알이 터지는 소리가 구수한 장단이 된다. 바가지에 담아 동치미와 곁들이면 기나긴 밤이 그토록 고마울까.

벌거벗은 나목은 얼어붙은 땅속 깊숙이 뿌리에서부터 봄맞이 준비를 한다. 버텨냄의 시간이다. 삶을 어찌 보느냐에 따라 춥고 어두웠던 순간도 추억이 된다. 힘겨운 겨울나기를 하고 있는 벗에게도 전해주고 싶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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