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광장] 유인순 한국커리어잡스 대표이사

셋째 아이를 낳고 대문의 금줄을 걷자마자 난감한 일이 이어졌다. 보건소 직원이 출근하다시피 집에 드나들었다. ‘딸 아들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 그때, 대한민국은 인구 폭발을 우려한 총력전을 펼치고 있었다. 온갖 교육 자료를 들고 와서 아이를 더 낳는 것이 얼마나 미개한 일인지 열을 올리며 설명을 했다. ‘두 집 걸러 한 명’이라더니 ‘삼천리가 넘쳐난다’는 제목으로 한반도 지도안에 빼곡하게 겨우 서 있는 사람들이 급기야는 바다로 튕겨 나갈듯한 사진 앞에서는 더는 할 말을 잊었다. 출산 앞에는 남녀의 은밀한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는데 그것을 국가가 관리한다고 날마다 대문이 닳도록 드나드니, 시부모님 보기도 민망하고 보건소 직원과 마주칠까 봐, 눈 뜨면 밭으로 향했다. 젖이 퉁퉁 불어 밭고랑에 떨어져도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급기야 80년에는 인구정책으로 셋째 아이부터는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주지 않기로 했다. 막내가 80년 8월생이니 더 낳으면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고 국가가 엄포를 놓은 것이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도 산아제한 교육은 일상이 되어, 정관수술을 하면 훈련을 면제해주기도 했다. 아이를 덜 낳는 일이 나라를 지키는 일쯤으로 여겼나 보다. 피임 도구까지 가져와 사용 설명을 하는 보건소 직원 앞에서 결국 시어머님이 해결책을 들고나왔다. 수술 후 부작용이 있을 수 있다며 아들 대신 며느리를 지목했다. 그리고 보건소 직원과 수술 일정을 잡으셨고, 나는 농사일과 시집살이의 고단함을 벗어나는 날이라 생각하고 놀러 가듯 보건소 직원을 따라나섰다. 막내를 출산한 몸이 아물기도 전에 피임 수술을 했다. 전쟁터의 간이침대가 그러했을까? 젊은 엄마들이 수술실 밖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나를 수술실로 집어넣은 보건소 직원은 일생의 업무를 다 한 듯 사라졌다.

혼자서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 마취가 풀려서 배를 움켜쥐고 겨우 내판역에 내렸다. 역에서 집까지 30여 분 거리인데, 주저앉아가며 세 시간 이상 걸려 어둑해진 대문으로 들어서니 어디서 놀다 온 줄 안 시어머니의 불호령에 놀라 털썩 주저앉았다. 그렇게 스물다섯 어린 나이에 단산했다.

며느리 셋이 다섯 명의 손자 손녀를 낳았다. 혼자 낳아도 너끈할 숫자이지만, 요즘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낳지 않으려는 시대에 둘씩 낳아준 게 얼마나 감지덕지할 일인가. 더구나 결혼연령이 늦어지다 보니 막내며느리가 마흔이 넘는 고령의 산모로 출산을 할 때는 걱정도 많았다. 손자 손녀들이 무탈하게 잘 자라고 있는 게 감사하고 또 감사할 뿐이다. 더는 욕심이다.

우리 회사는 30대 젊은 직원들이 많다. 해를 걸러 결혼식이 있었고, 아이를 낳았다. 아빠들과 엄마들이 육아휴직과 출산휴가를 수시로 사용했다. 법으로 지정된 거니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회사에서는 아기들이 열 명 넘게 태어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대부분 육아휴직을 사용했다. 한 여직원은 7년 동안 세 아이를 낳아 기르느라 실제로 근무한 일수와 휴직 기간이 맞먹는다. 덕분에 ‘가족 친화 인증기업’이라는 타이틀을 갖기는 했지만, 돌이켜보면 아이를 낳아 기르는 일이 애국하는 일이라는 신념이 있어서 가능한 문화였다. 출산일이 다가오는 여직원을 살포시 안아준다. 다음 달에는 두 명의 여직원이 출산휴가와 육아휴직에 들어간다.

선거철이 다가오자 온갖 정책이 난무하는데, 불과 40여 년 전에는 상상도 못 할 출산장려정책들이 쏟아진다.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구성하는데 사람보다 더 중요한 자원이 있을까? 그러게 그때는 왜 그렇게 애를 낳지 못하게 했었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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