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양승복 수필가

음산한 날들이 이어지고 있다. 겨울비까지 몰려와 자근자근 밟고 다닌다. 겨울에는 삭풍이 불어 나목들 떠는 소리가 골짜기를 울려야 하고, 서릿발이 땅들을 단단하게 세워 꽁꽁 얼어야 하는데, 추위에게 곁을 주려 하지 않는다. 도랑물이 졸졸 흘러내리고 꽃들은 시기를 모르고 일찍 피어 버리니 걱정이다.

나는 붉은 빛이 도는 좋은 밭이다. 흙이 좋다고 살이 좋은 땅이라 한다. 봄이 되어 트렉터가 흙을 고르면 지나는 사람들이 한 번씩 바라본다. 이쁘다 한다. 골을 타면 바람이 바닷물을 찰랑거리고 몰고 오는 거 마냥 골골이 햇살이 들어 찰랑거린다.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농부가 원하는 수확물을 안겨주는 것이다. 사람들이 몰려와 씨감자를 흙살 속으로 쏙쏙 넣으면 더할 나위 없이 황홀하다. 주변에 놀고 있는 땅도 있는데, 나는 생육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농부가 나를 가꾸고 믿는 이상으로 감자를 키워 낼 것이다.

힘주어 초록색 싹을 틔워 올리면, 하늘이 구름을 불러 촉촉하게 봄비를 하사하라 이른다. 비도 받아먹고 햇살도 쪼이고 밤하늘에 흐르는 별빛을 친구삼아 바람에 흔들리는 사이, 잎은 우거져서 하늘을 뒤덮는다. 하얀 감자 꽃을 피워내면 “벌써 감자 꽃이 피었네.” 하며 사람들이 세월의 빠름에 감탄한다. 땅속이 비좁을 만큼 감자는 살이 오르고 그 좋던 흙살은 점점 거칠어지고, 감자가 영글며 부풀어 올라 흙살이 터진다. 그러면 감자는 어린 티를 벗고 뽀얀 알이 굵은 모습이 된다.

어느 날, 몇 명의 아주머니와 함께 농부는 나를 호미로 헤집기 시작한다. 고운 흙살을 칭찬해 가며 주렁주렁 따라 나오는 감자를 손에 들고 감탄한다. 땅이 좋아서 농사가 잘 되었단다. 농부가 나를 버려두지 않고 가꾼 덕인데 내 덕이라니 감사할 따름이다. 아직은 여름인데 무엇을 다시 심을 것인지, 트렉터를 끌고 와 반듯하게 고르고는 오지 않는다. 들깨를 심을 것인가, 김장배추를 심을 것인가, 기다리던 차에 농부는 옥수수씨를 무심히 던져 주고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는다. 실하게 자라지 못한 옥수수는 수염만 내밀다 말았다.

나를 버린 건가. 나를 버려둔 것인가. 바람이 옥수수 대를 흔들면 바스락 바스락 속삭인다. 네 탓이야. 어떻게 할 거야. 옆에 있는 배추밭 비닐들도 같이 떠들어 대니 서글프다. 산등성이 있던 커다란 고추밭은 칡넝쿨이 무성하게 자라 경계가 모호한 산이 되어있고, 그 아래에 있는 묵정밭은 잡풀들이 자리하여 여름이면 망초 꽃을 흔들며 유혹한다. 놀아보면 그 맛도 나쁘지 않다고. 나는 안다. 선택받지 못한 자들의 오만인 것을.

빈들에 외롭게 서 있는 허수아비에게 지나가는 바람은 동네 소식을 전한다. 근방의 묵정밭 안노인이 돌아가셨다고 소곤거린다. 빈집이 자꾸 늘어난다. 오랫동안 나를 가꾸던 농부도 힘이 약해지면서 외지에 살던 아들이 들어와 농사를 거들고 있다. 그는 근면한 사람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밝으며, 다행히도 나를 아낀다. 농부는 나를 오래 쉬게 하여 힘을 길러 줄 심산인거다. 빈 땅을 어떻게 알고 몰려오는지 풀씨들이 종족 번식을 위해 아우성을 칠 것이니 옥수수로 진을 치고 막은 것이다. 농부는 트렉터로 옥수수 대를 우겨 넣고 몇 번이고 돌며 잘게 부셔 줄 거다. 땅으로 스며들기를 기다려 흙과 거름을 다시 넣어 곱게 섞어 줄 것이다. 그러면 나는 다시 몸단장을 시작하여 살이 곱고 힘 있는 붉은 흙으로 거듭나 사람들을 유혹할 거다. 봄이 기다려진다. 농부는 분명 나를 선택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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