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칼럼] 한옥자 수필가

햇빛 보기가 어려운 흐린 날이 계속되고 있다. 입춘을 하루 앞둔 날도 아침부터 흐리더니 오후에는 아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 비는 밤새 이어졌고 이튿날도 여전히 흐리거나 비가 내렸다.

겨울은 비보다 눈이 내려야 겨울답다. 하지만 이번 겨울에는 비가 자주 내렸다. 아직 설도 되지 않았건만, 이 겨울에는 어찌 눈보다 비가 더 자주 내리는가. 겨울이 겨울답지 않았듯이 인간 세상 또한, 살만하지 않아 날씨마저도 반기를 드는가. 유심히 보니 겨우내 알몸으로 버틴 나뭇가지에 초록빛마저 감돌고 있다. 기후 위기에 대한 염려는 진즉부터 전 세계의 화두였지만, 염려와 달리 위기는 점점 더 피부에 닿고 그 무엇보다 뚜렷한 사계절을 내세우는 우리나라도 계절의 경계가 점점 무너진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과 시민들은 이렇게 비가 오던 3일, 서울 도심을 행진했다. 멀쩡하던 자식들이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으니, 불볕더위와 폭우 중에 무릎이 부서져라, 삼보일배를 한들, 삭발하거나 냉기가 엄습하는 땅바닥에서 오열한들 그 속이 풀릴 리 없다. 하물며 서울 이태원 참사의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 방지를 위한 특별법을 또 거부당했으니 이 나라의 위정자와 여당은 인간에 대한 예의도 모르고 피와 눈물도 없으며 매우 비정하다는 말을 아무리 많이 들어도 고개조차 들지 않아야 마땅하다.

자식을 잃은 참척의 고통과 슬픔을 소설가 박완서 씨는 일기로 남겼다.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작가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 대신에 여러 명의 딸 중의 한 명을 차라리 데려가셨다면 어땠을까, 라고 자신도 모르게 생각하다가 소스라치게 놀라 입을 막고 가슴을 내리치며 성호를 그었다. 또한 용기를 내 아들 곁으로 가기는커녕 버젓이 살아 음식을 넘기는 자신이 혐오스러워 토악질했다.

자식이 떠난 이후에도 끼니때만 되면 배는 영락없이 고파왔고 그것이 너무도 부끄럽고 괴로워 미칠 것도 같았다. 기막힌 애통과 절망 때문에 살고 싶지 않으니, 목숨도 자연히 단축해 줄 거로 알았는데 마음과 다르게 끼니때만 되면 먹고 싶어 하니 육신에 대해 하염없는 슬픔과 배신감이 들고 자신이 짐승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괴로운 나머지 먼저 간 아들의 흠을 잡으려고 온갖 생각을 짜내어봐도 겨우 떠올린 단점마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는 걸 깨닫자 억장이 무너지더라니 오죽하면 자식을 앞세운 부모는 짐승 같은 울음을 운다고 했을까.

이태원 참사의 유족이 자식을 앞세운 지 두 해가 바뀌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도 내 자식이 거리에서 왜 생떼 같은 목숨을 잃어야 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러니 참척의 고통이 나아지기는커녕 살아도 산 것이 아닌 헛된 목숨을 잇느라 냉기가 도는 차가운 바닥도 마다치 않고 이 겨울도 견디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들도 고통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바라고 바라는 것일 뿐인데 이 정부는 누더기가 된 특별법마저 끝내 거부하고 오히려 돈을 내밀며 봉합하려 드니 세월호 사건의 부모에게 하듯 자식 팔아 돈을 사겠다는 프레임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고 무엇이던가.

누구라도 자신이 그들과 같은 입장이라면 진상을 요구하고 그에 따르는 잘못을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이 마땅히 책임지고 벌을 받길 바란다. 그러니 유족을 향해 돌을 던져 이중삼중의 고통을 주지 말자. 최소한 자식을 둔 부모만큼이라도 유족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대하는 최소한의 도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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