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단상] 이동규 청주순복음교회 담임목사

세상을 이해하는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고 가장 고전적이고 또 가장 대중적인 이론이 바로 ‘흑백논리’이다. 이는 세상을 빛과 그림자와 같이 완전히 다른 두 구도로 나누어서 이해하는 관점이다.

그래서 세상에는 선이 있으면 악이 있고 정의가 있으면 부정이 있다. 진실이 아닌 것은 거짓이며 강자가 아닌 이들은 약자가 된다.

물론 빛과 그림자처럼 완전히 둘로 나눌 수 있는 개념에서 이러한 관점은 아주 유용하다. 그러나 문제는 세상의 모든 것이 늘 분명한 경계를 가지고 나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념이나 사상을 중심으로 자신의 편을 세우려고 할 때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의견을 지지해줄 것인지 물었을 때 그 사람의 태도가 조금 머뭇거리거나 확실한 대답을 주지 않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편이 아닌 적으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는 로마로부터 공인을 받은 이후에 제국을 중심으로 급속히 세력을 확장했다. 교회는 점점 힘이 생겼고 그 힘의 중심에 서기 위한 치열한 경쟁이 시작되었다.

교회를 지키고자 했던 선의의 노력들이 이단 논쟁에 휩쓸리면서 다툼과 분열을 낳게 되었고 결국 교회 내에서도 힘이 있는 자와 힘이 없는 자 사이의 경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실 이런 모습은 비단 기독교 역사만의 독특한 특징이 아니다. 함께 무리를 지어 공동체 생활을 하는 곳이라면 으레 이런 흑백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성경이 묘사하는 하나님의 기본적인 속성은 이런 흑백논리의 이념적 한계를 가볍게 넘어선다. 하나님의 모습은 때로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섬기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너무나 생소하게 보일 정도였다.

요나는 어느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에게 니느웨라는 도성에 가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선포해야할 임무를 부여하신다. 그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은 니느웨 성이 40일 이후에 멸망당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요나는 이 말에 담겨 있는 하나님의 진짜 의도가 니느웨를 심하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의 사람들을 용서하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요나가 경험한 하나님의 모습은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요 4:2)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며 니느웨와는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향한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향해서 죄를 범한 니느웨의 백성들은 심판을 받아 멸망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논쟁을 벌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스스로를 선하다고 여기는 요나 조차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키신다. 요나가 하나님 앞에서 선한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본래 선한 성품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 남들보다 더 많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경험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이제 스스로의 죄가 무엇인지 분별하지도 못하며 좌로나 우로 휘청거리며 멸망을 향해 가는 니느웨의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자비와 은혜를 베푸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며 그를 설득한다.

마태복음은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며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말하면서 그 근거로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마 5:45)고 말씀한다.

세상을 빛과 그림자로 나누어 보는 것은 세상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 일에는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관점으로는 지금 내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의 근원이 보다 분명하게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만약 요나의 바람대로 하나님이 니느웨를 향해 용서가 아닌 심판의 불을 내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멸망해 가는 니느웨를 바라보는 요나의 마음은 행복했을까? 아마도 그랬다면 요나는 한 평생 언젠가 자신도 저 꺼지지 않는 심판의 불로 멸망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결국 원수를 용서하는 일은 온 세상을 빛과 그림자의 이분법적인 시작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할지라도 모두가 내가 살아가야 할 아름다운 세상이며 또한 아름답게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라 소망을 갖게 하는 방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적대심이 아닌 오직 용서와 이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우리의 삶이 진정한 행복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때 우리가 빛에 거하던, 그림자에 거하던 똑같은 행복을 누릴 수 있음 또한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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