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목련] 이향숙 수필가

달력이 한 장 넘겨졌다. 우리 가족이 새해를 맞이하려 강변을 거닐었던 날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설 명절을 맞이했다. 거부할 수 없는 속도로, 속수무책으로 끌려왔다. 여차하면 한 주가 가고 한 달이 지나간다. 일터에서는 허둥대다 설맞이를 준비하고 대목을 보게 되었다. 긴장감과 안도감이 뒤엉켜 뒹굴다 보니 연휴가 끝나고 동료들이 돌아왔다. 긴장이 풀려선지 몸살이 영혼까지 잠식시켰나 보다. 몸을 일으켜 커튼을 걷지도 못하고 이불속에서 뒤척인다.

열흘 전쯤 뒤뚱뒤뚱 안노인이 오셨다. 미용실에서 머플러를 두른 채 나와 한 손엔 떡을 들었다. 점심시간을 놓쳐 허기지는지 서둘러 계산하려 하지만 지갑을 여는 일도 쉽지 않은가 보다. 다행히 사람들은 느리게 돈을 꺼내고 계산하는 것을 기다려 주었다. 어르신은 매장 어디라도 앉아서 떡을 먹고 싶단다. 뒤쪽을 향해 자리를 내어드리라 하고 오랜만에 북적대는 계산대를 지킨다. 동료가 의자를 마련해 앉히고 더운물을 한잔 대접하는 살가운 음성이 들린다. 설날에 자손들에게 고운 모습을 보이고 싶은 그의 마음을 알기에.

서민의 삶이 출렁대는 지난한 계절이다. 설날이 다가와도 대목은 기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터가 농촌지역이라 어르신들이 자손들을 기다리며 미리 음식을 장만한다. 물김치를 담그고 만두소를 준비하는 손길로 스산하던 거리가 잠시 활기를 찾았다. 차례상에 놓을 제수용품을 사고 잊으신 게 있다며 다음날 다시 들어선다. 천천히 둘러보고 꼼꼼히 시장을 보면 댁까지 모셔다드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벨이 울린다. 빠트린 것이 있다며 지나는 길에 갖다 달라신다.

대목이란 무엇인가. 우리 같은 상인에게는 명절을 앞두고 경기가 활발해지는 시기이다. 몸은 고되더라도 마음은 넉넉하다. 그렇다면 어르신들의 대목은 조상님을 모실 차례상을 준비하고 자식들을 만난다는 기쁨으로 그들의 어릴 적 좋아하던 음식을 장만하는 과정이 아닐까. 대가족이 모여 살던 시절, 삼 사대가 얼굴을 마주하던 그때의 고단했지만 애틋했던 순간. 되돌아갈 수 없으나 그리운 이들을 위해 기꺼이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내게도 그런 추억이 있다. 바다가 가까워 차례상에 갯것을 올리는 것은 물론이고 집에서 만든 강정은 조청까지 직접 쑤었었다.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를 만들고 전을 지지던 어머니의 모습은 그림처럼 남아있다. 다시마와 무를 넣고 끓인 육수에 소고기 한 근 빠트려 푹 삶아 떡국을 끓여 주시던 설 명절의 풍경이다. 세상에서 고단한 시간을 보냈더라도 온 가족이 모여 떡국 한 그릇은 나누고 나면 재충전이 되었다.

우리 가정은 아직 이런 따뜻한 명절날을 만들지 못했다. 해마다 온 가족이 모여 일터를 지킨다. 고향을 찾은 이들이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기도 하고 미리 장만해 두었더라도 부족한 물건이 있으면 찾기 마련이다. 그들의 불편함을 덜어주기 위함만은 아니다. 그날마저도 대목이기 때문이다. 명절을 쇠러 간 동료들을 기다리며 지내는 시간이 고되지만 나름 사랑하는 가족과 호흡을 맞추는 일도 즐거움이다. 어느 날 문득 다가올 그리움임이 아니겠는가.

마음을 다잡고 커튼을 걷자 햇살이 따습다. 대목을 보느라 애쓴 가족과 이제 우리만의 명절 연휴를 즐겨 보아야겠다. 고뿔 걸리지 않게 옷을 챙겨 입고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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